일부 스포 있습니다. 영화의 감상에 있어 별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만 간혹 시비 걸리는 일이 있어 일단 있다고는 알립니다.
40여 년을 목수로 별다른 욕심 없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느 날 일하던 중 갑자기 심장병이 발생하여 의사로부터 완치될 때까지 일을 쉴 것을 권고 받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보험에 질병급여를 신청하려고 하나 기각을 당하고 이에 대한 대한 항의를 하러 관공서에 찾아갔다가 아이 둘을 가진 싱글맘 케이티를 만나게 됩니다. 런던에서 뉴캐슬로 떠밀리듯이 이사 온 케이티도 사회보험 수당을 받기 위해 면담 예약을 잡았으나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40%의 보조금이 삭감당하는 제재를 당하는데, 지켜보던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무관들을 향해 항의를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케이티와 가깝게 지내게 됩니다. 그렇게 영국의 사회 안전망에서 밀려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던 중에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사회 보험의 진단 담당자에게 ADLS 장해 평가를 받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ADLS는 일상 생활에서 이동, 음식물 섭취, 배변/배뇨, 옷 입고 벗기 등에 있어 얼마나 불편함을 가지는가를 점수로 매기는 척도입니다. 하지만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런 단순한 신체 활동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의 문제는 몸으로 일하는 목수일을 하기엔 심장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이고, 이를 계속 항변하지만 ADLS로만 모든 장해를 평가하는 것이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사회보험에서는 이를 인정하기는 커녕 그 문제를 바라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진단 담당자가 직업 윤리 의식이 부족하거나 혹은 인간성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닙니다. 분업화된 사회에서 최소한의 권한과 최소한의 업무 흐름만을 맡고 있는 일개 담당자의 한계가 있을 뿐이죠. 하지만 그러한 시스템의 희생자들은 그런 시스템이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을 담당하고 있는 담당자가 불성실하기 때문이라고 오해를 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저소득-저학력 계층은 분업화된 사회 구조의 몰인간성에 대해 깨닫기보다는 자신이 노력을 통해 그러한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영화는 여기까지 논의를 확장시키지는 않습니다마는 여튼.
ADLS는 분명 인간의 장해를 점수화시키는 데 쓸만한 척도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ADLS 점수가 낮다고 해서 심지어 0점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장기 혹은 신경 등의 손상, 지능, 교육, 기술 등의 부재로 1인분의 삶을 자신이 온전히 지탱할 수 없는 수많은 이방인이 존재합니다. 스코어링으로 합/불을 가르는 시스템의 맹점이란 이런 곳에서 등장합니다.
점수라는 것은 분명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차원으로 줄여 판단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지만 문제를 판상적으로 압축시켜서 그것이 복합적인 문제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지 혜택의 수급을 판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ADLS가 기준점을 넘어가더라도 컴퓨터에 능해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육체노동은 불가능하여 소득이 끊길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수급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그에 비례하여 어마어마한 비용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대개 정권은 집권을 위해 조세 부담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되도록 피하려고 하죠. 꼭 그게 영국 보수당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결국 민주주의란 그런 거니까요.
어찌 됐든,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소득의 재심을 요구하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사회복지 시스템은 인력의 효율화를 꾀한다는 미명하에 모든 신청을 인터넷으로만 받아버리게 됩니다. 그리 하여 가정에 인터넷 망을 놓을 수 없는 수많은 빈곤층과 컴퓨터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노년층에게 제대로 엿을 먹입니다. 복지 지출을 늘리고 싶지 않은 정부의 방침에 딱 맞아떨어지겠죠. 다니엘은 난생 처음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잡고 정부 홈페이지와의 씨름을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의 도움 끝에 다니엘 블레이크는 결국 인터넷을 통해 질병소득의 재심 신청과 실업급여의 청구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실업급여의 청구를 위해서는 구직활동의 증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다닐 마음도 없는 일터에 이력서를 돌리러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평생을 고집해 온 원칙을 꺾어야 하는 다니엘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 소득을 얻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꺾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꺾도록 강요하는 것이 다름 아닌 국가라는 존재라면 과연 그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서운 진실은, 국가는 그런 곳에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일부러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면 갱생의 여지라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극도로 분업화된 시스템에서 각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토막난 일을 원리와 원칙대로 할 뿐, 그 원리와 원칙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담사는 콜이 오는대로 상담을 할 뿐이고, 장해 심사자는 체크리스트 대로 심사를 할 뿐이고, 구직소득 담당자는 구직활동의 증빙의 충족 여부를 체크할 뿐이고 수급 결정자는 점수가 매겨진 대로 OK와 NO를 결정할 뿐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인데 결과는 다니엘을 엿 먹이는 결과가 나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자신의 앞일만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한 개인을 엿을 먹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람은 불성실한 노인에 불과합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천만의 국민을 관리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개인이 아니라 뉴캐슬의 60대 노인 1명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본질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커트라인을 15점으로 정하면 몇십만명이 질병소득을 타갈 수 있고 20점으로 정하면 몇십만명이 질병소득을 타갈 수 있다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개인의 비극이 겨우 1이라는 숫자로 밖에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이든, 1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러한 시스템이 온당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공무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평가로 또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케이티는 다니엘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삶을 버텨나갔고, 옆집에 사는 차이나는 진심으로 도와줄테니 도울 일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을 남겼고, 동료들은 그를 늘 친밀하게 대했고, 심지어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를 받은 해리는 그를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해 옵니다. 실업급여를 심사하는 심사관은 이력서 작성 수업 때 도대체 뭘 했길래 이런 걸 만들어 왔냐고 타박하는 그 이력서를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개인에 대해 입체적으로 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고 신뢰합니다. 그가 경찰서에 끌려 갔을 때에도 훈방조치로 끝나고 맙니다. 오로지 인간의 삶을 종이에 2차원으로 옮긴 서류만으로 그를 심사하려 하는 사회복지 시스템 내에서만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위에 첨부한 포스터에 적혀 있는 [다른 세상을 향한 따뜻한 희망]이라는 영화의 카피는 개인적으로 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사는 이 영화가 인간성을 상실한 분업화된 사회복지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리 낙관적인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사회를 더 많은 차원에서 더 단순한 방식으로 압축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죠. 컴퓨터의 연산 능력은 계속해서 증가할 테지만 결국 정책을 결정하는 인간 뇌의 능력은 더 이상 개발되기 힘드니까요. 그래서 영화의 끝을 알리는 다니엘의 투쟁 선서가 더더욱이 씁쓸합니다.
★★★★☆
외화 | 2313명이 읽었어요. 3.19.60.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