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세척이 끝난 후, 알맞은 옷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차가웠던 온도에 익숙해진 엘란츠는 머리카락에 물과 같은 세척제를 이용해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머리를 감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지구에서는 비가 내려도 오염 되어버린 비가 내렸기에 함부로 머리를 감았다가는 피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담군 세척액은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 이물질이란 이물질은 전부 다 알아서 떨어져 나갈 정도였고, 덕분에 몸에 더 이상 때나 비듬, 각질과 같이 불필요한 것들은 전부 세척액 속에서 녹아 사라져버렸다.
머리를 전부 감고 난 엘란츠는 어느새 자신이 담겨있던 세척액이 절반 수준밖에 남지 않은 모습과 함께 여기저기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져 세척액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 알몸인 엘란츠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세척 단계가 끝났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단계?"
"계에아아아─── 아아아─── 아──"
이번에도 처음 그가 세척액에 빠졌을 때처럼 바닥이 푹 꺼짐과 동시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시 어두운 공간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의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속에서는 계속해서 따듯한 바람이 그를 감싸주었기에 춥거나 하진 않았다. 게다가 미끄러지는 마찰열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만약 이 공간에 마찰열이 존재했다면 그는 열에 의해 녹아내렸을 것이다. 속도는 그만큼 빨랐다.
엘란츠의 비명이 멈췄을 때, 몸의 물기는 전부 말라있었다. 물기 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말라있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런 그의 몸이 사방에 반사되어 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직접 보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이 서있는 공간과 자신을 비추고 있는 공간에 하얀 색, 환한 조명.
이제까지 심하게 고생했지만, 세척을 마치고 난 후의 모습이라 그렇게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이번에는 아루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의상실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전에, 미용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반사 된 자신의 모습에서 길게 내려와 눈을 가린 머리카락과 목을 가릴 수 있을 수준의 턱수염에 붉은 빛이 나타나 감싼다. 엘란츠는 그 빛이 신기해 손으로 만지려고 했지만 그 순간,
무엇인가 타는 냄새와 동시에 따듯한 열이 머리카락 근처와 턱 근처에 전해져 왔다. 깜짝 놀란 그는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깔끔한 턱만이 나타난 그의 얼굴에 드러난 적갈색의 눈동자와 짙은 갈색의 눈썹. 비록 말랐지만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
엘란츠는 놀래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턱을 만져보고 단정하게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그 과정에서 손톱 역시 어느샌가 정리되어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확실했다. 앞에, 옆에, 뒤에 주위에 있는 남자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 확실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이라면 알몸이었다는 점이다.
"원하시는 복장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아루잔의 말과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자신을 비추던 모습이 제각각 다른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까지 패션이라는 걸 신경 써 본 적 없던 엘란츠는 오래 된 책에서나 보았던 옷들을 고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쉽게 고를 수 없었다. 모두 다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했고, 본 적 없는 자신의 모습에 어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위 아래가 모두 검은색인 옷이 있는가 하면, 갈색과 황색이 상체를 길게 덮는 옷이 있기도 했고, 팔 부분이 나풀 거릴 것만 같이 부풀어있는 하얀색 옷에 발 끝이 바닥에 끌릴 것 같은 검은 바지의 차림새가 있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옷에서 엘란츠는 결국 위험한 병 중 하나인 선택장애 병의 초기 증세가 나타나게 되었다.
"뭘... 골라야 할 지 모르겠어."
눈이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가기를 반복하지만 고르질 못하는 엘란츠에게 아루잔이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복장은 어떠신가요?"
주위 다양한 모습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 하나의 차림새가 나타났다.
나풀,하얀색,바닥 끌림의 검은색 바지.
"이 복장은 [디스코 월드]라는 행성의 격식을 차릴 때 입는 전통 복장으로 신나고 활기찬 활동을 위해 디자인 되어있습니다. 특히, 행성 전통 행사인 [금요일 밤의 열기]가 시작되면 모두가 이 복장을 하고 디스코라 불리는 춤을 추기로 유명합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엘란츠는 아루잔이 하는 말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옷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단 한 부분, 바닥에 끌릴 것 같은 바지를 제외한다면.
"다른 건 어떨까?"
"그렇다면, 이 복장은 어떠신가요?"
이번에 아루잔이 권한 차림새는 빨간색 나비 넥타이에 하얀색 상의, 흘러내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멜빵이 부착된 검은색 바지와 갈색의 외투였다.
"우주를 여행하는 의사가 입는 복장인데, 한 때 화제가 되어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고 되어있어요. 어떠신가요?"
'우주를 여행하는 의사는 또 뭐지? 유행은 또 뭘까.'
엘란츠의 눈에는 다 괜찮아 보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멜빵이었다.
"미안한데... 다른 건..."
"네! 그렇다면 다른 복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루잔은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여러가지 의상을 보여주었고 그 때마다 엘란츠는 한 가지씩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온통 빨간 색에 들러붙는 옷이라는 점이라던가,
휘황찬란하게 번쩍 번쩍 빛나서 눈이 부실 정도의 부담되는 옷이 있기도 했고,
나는 바보 멍청이 빌어먹을 놈이다 라는 문자가 적힌 옷이 있기도 했으며,
속이 훤히 비춰 입어도 입지 않은 것 같은 옷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무난한 복장이 나타났으니...
목에 두른 붉은 색 긴 목도리에 하얀 셔츠, 아주 약간의 푸른 빛을 띄운 검은 청바지, 커다란 후드 모자를 지닌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단추 세 개의 검은 외투. 그리고 튼튼해 보이는 검은 부츠까지.
"응. 이거로 했으면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중앙실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옷을 골랐을 뿐, 아직 전혀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엘란츠는 이번에도 마법처럼 한 순간에 자신에게 옷이 입혀지는 건가 싶은 마음에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으아아아─── 아아아─── 아──..."
순식간에 옷을 입는 마법 대신 바닥이 사라지는 마법이었다.
그가 어딘가를 향해 미끄러져 나갈 때, 하의부터 신발까지 달라붙듯 입혀졌다. 물론 그 안에는 속옷과 양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처음으로 아루잔의 얼굴과 만났던 중앙실로 가볍게 착지하여 서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올라간 양손을 통해 단추까지 잠겨있는 셔츠와 외투가 입혀지고 그 위로 붉은 목도리가 목 위에 걸쳐졌다.
"어서 오세요!"
빛나는 하얀 종이, 아루잔의 얼굴이 나타나 진정으로 최상의 컨디션이 된 엘란츠를 반겼다. 정작 엘란츠 본인은 지쳐버린 얼굴이 되어있었지만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쉬어주세요!"
엘란츠는 아루잔의 말에 바닥에 앉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바로 뒤에 무언가 있음을 알아채고 뒤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바닥 위의 동그란 자리와 등받이가 있었고, 그것을 손으로 만져보았을 때 너무나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자신이 앉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음과 동시에 자리에 앉아 외투와 목도리를 앉은 자리의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아루잔이 알몸에 내부의 온도를 맞췄기 때문이었다.
엘란츠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루잔에게 말했다.
"이제 다 된 거 맞지? 나 더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거지?"
"네? 아, 네!"
엘란츠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동 경로는 역시 죽음의 보호로 하시겠습니까?"
"죽음의 보호가 뭐야?"
빛나는 하얀 종이에서 아루잔의 얼굴이 사라지고, 흉터가 가득한 남성의 얼굴이 나온다. 아루잔과 달리 현실적인 모습이다.
"생명을 당신에게서 뺏지 않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사기가 아니니까 믿어주세요! 이곳으로 오시면 수명을... 오기 전 혈액형 검사는 필수! 요즘 얼마나..."
치지지직─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더 이상 소리가 나질 않자 아루잔이 나타나 곤란한 듯 웃으며 말한다.
"수신 상태가 양호하지 않네요! 현재 등록된 정보 중에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을 가진 행성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확인된 장소입니다. 또한 들어간 이후로 나온 이가 없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상당히 수상한데... 어머니께서도 흉흉한 세상이니 사기꾼과 식인종은 조심하라고 하셨었어. 혹시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루잔에게 있을까?'
"혹시 말인데... 사기 아니야?"
"네!? 알아볼까요?"
"응. 부탁해. 어머니께서 사기 당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알겠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아루잔이 말했다.
"...잊어주세요."
잡담 | 1692명이 읽었어요. 3.149.214.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