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획자입니다.
대학졸업하고 나이 거의 차이 안나는 젊은 사장에게 홀려서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에서 일했었거든요.
정말 쉬는 날 없이 구둣발로 정강이 맨날 피멍들어 있을 정도로 쳐맞으면서 일했는데
거의 1인 기업 수준으로 오만 일 다했어요.
그때 첫 월급이 78만원인가 그랬음.
당시 업무내역이랑 프로젝트들만 그냥 쭉 나열해도 A4 10페이지 채우고 넘치는데
암튼 거기서 5년 동안 일하다가 몸도 씹창나고 도저히 더 못버틸 것 같아서 퇴사합니다.
그러고 다음으로 좀 규모있는 업체에 입사했는데 씨벌 여긴 일도 일이지만
위아래로 파벌이 장난 아니라서 그 사이에 껴서 진짜 오라지게 고생했네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목이 안돌아가서 한의원다니고, 고혈압에 오만 성인병
다 진단받은 담에 마지막으로 위에 천공 판정 받고 사표 써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력은 10년 다되어가는데 연봉이 3천이 안됐었어요.
올려달라니까 안된다길래 도저히 더 몸 버리면서 일 못하겠어서 그냥 사표던짐.
사표내고 일단 몸부터 추스리려고 병원다니고 쉬다가 아는 사장님이 기획쪽 일을 물어보길래
밥먹으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알려드리니까 갑자기 술을 사주신대요.
그래서 술 마시면서 일얘기 나누는데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 기반으로 사업플랜이랑
수익구조, 마케팅 방안 다시 짜드렸더니 갑자기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내 주시는거에요.
이거 뭐냐니까 계약금이라고 내일부터 출근 좀 하라는거에요.
그래서 절대 안한다고 거절했더니 자리 옮기자고 해서 양주 깠다가 정신차려보니까
그 회사 사무실에 앉아 사업기획하고 있었네요.
그 때 연봉이 30%정도 올랐었는데 몸이 안좋다고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기로 했었음.
정말 3일 일하고 4일 쉬고 천국이 따로 없었는데 몸이 좀 회복되고 나니까 좀이 쑤시더라구요.
마침 자회사가 하나 설립되면서 거기 일도 맡아달라고 해서 주4일 근무로 늘리고
투잡처럼 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이 일하던 이사님이 개인적으로 사업타당성 분석 건을 하나 맡기셨는데
이사님이 따로 사업하시려나보다 하는 생각에 시간도 남고, 평소 잘 해주시던 분이라
돈 안받고 그냥 시작했거든요.
평소 관심있던 분야기도 해서 시간도 널널하고 하니까 현장 가서 죽치다가
지역 상인 분 소개 받아서 술마시고 놀다가 입주민 대표분 소개받아서 술마시고
줄줄이 이 분 저분 소개받아서 놀았네요.
분석하다가 이것저것 아이디어 떠올라서 도움되실지도 모르겠다고 별도로 방안 덧붙여서
한 달 정도 걸려서 완성해드렸는데 갑자기 저녁을 사주신대요.
]뭐 먹고 싶냐고 해서 그때까지 대게 한 번도 못먹어봐서 대게 먹고 싶다고 했는데
생애 처음으로 대게랑 랍스타 코스요리로 배터지게 먹어봄.
그러고 자리 옮겨서 술 마시는데 처음보는 대표님 한 분 오셔서 인사드리고 멀뚱멀뚱
있었더니 대뜸 분석보고서 얘기 꺼내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길래 대답해드리다가
정신차려보니까 다음달부터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이사님이 지금 회사 주3일 출근, 새로운 회사 주3일 출근으로 조정해주기로 했는데
주6일제 안해본 것도 아니고 팀 하나를 통째로 주셔서 업무분장 하고 관리운영만 하면
어렵진 않을 것 같네요. 무엇보다 모아놓은 돈 없어서 결혼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여자친구랑 연봉 합하면 1억 5천 정도 돼서 대출받고 여름 오기 전에 결혼식
올릴 예정이네요.
연봉이나 그런것도 많이 기쁘지만 일단 뭔가 가치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제일 좋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덧없고 부질없던 것 같았던 좆빠지게 하던
일들이 결국엔 하나하나씩 누적되고 모여서 나중에 하나의 가치가 되는 것 같아요.
이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좋은 대학 나오고 머리 좋은 애들 무수하게 많지만
다들 경험없이 머리로만 편하게만 일하려고 해서 절 골랐다고 하시더라구요.
아직 아무런 결과도 없고 이제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지만 지금처럼만 하면
또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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