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면서 참 재미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읍니다..
요즘 대부분의 영화가 컷의 흐름을 빠르게 가져가서 극에 리듬감을 살리려고 하는 반면 이 영화는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유장한 흐름을 펼쳐 보입니다. 별 이유도 없이 마을의 염소들을 몇십 초씩 비추질 않나.. 인물이 멍하니 서 있는 걸 한참을 보여주질 않나.. 공간의 전환도 그냥 이뤄지는 법이 없죠. 천천히 줌 인 줌 아웃을 한다든가 아니면 카메라가 시점을 천천히 움직인다든가.. 빠르고 찰진 편집으로 이루어진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이라면 속이 터져버릴 정도의 유장함입니다. 아마 영화 내에 사용된 컷 수는 올해 개봉한 영화 중에선 압도적으로 적은 편일 겁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세 줄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아주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읍니다.
1. 자객으로 키워진 섭은낭은 검술의 대가이나 자객치고는 마음이 여린 편인 듯 하다(?)
2. 어느 날 섭은낭은 자객의 길을 걷기 전 혼약한 적이 있었던 전계안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3. 결국 섭은낭은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취를 감춘다.
이 이야기 구조에 아주 약간의 살을 붙인 게 이 영화의 모든 내용입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좀 황당한 것이 이 영화의 장르입니다. 얼핏 보면 무협 영화 같지만 정작 화려한 액션은 뒷전입니다. 액션은 상당 부분 절제되어 있고 그마저도 살의를 가진 액션은 그 중에서도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에서 다가오는 매력은 무협의 통쾌함이 아닌 애절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근데 웃기는 점은 섭은낭을 연기하는 서기는 단 한 번도 자객으로서의 포커 페이스를 풀지 않습니다. 초반부 아이가 귀여워 차마 아비를 죽일 수 없었다는 고백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나지막히 얘기하고, 그나마 이것이 100여 분의 영화 동안 섭은낭이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는 대사 두 마디 중 한 마디일 뿐입니다. 포커 페이스는 자객이라 그렇다 치고 말로라도 자기 마음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내비치는 적이 없음에도 이 영화를 통해 감독 허우 샤오시엔은 절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모순점을 보여줍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느냐. 결국 그건 이 영화의 호흡입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길고 긴 호흡이 섭은낭이 얼마나 전계안을 사랑했느냐를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엔딩 신에서 등장인물이 점이 될 때까지 고정된 카메라 시점으로 보여주는 (스탭 롤은 그 와중에 돌아가고 있고..) 부분에서 이건 그런 의도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로맨스를 그리는 영화지만 정작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대하는 태도는 거의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정말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위박이라는 공간적 무대가 어떤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는가를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의 이름을 잔뜩 대어가며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다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에요. 이해도 되지 않는데 잔뜩 주입만 시킵니다. 이놈의 설명충들. 그런 과정 속에서 정작 제일 중요한 섭은낭의 감정은 뒤로 숨겨지고 섭은낭의 행동만이 영화 속에 남겨지게 됩니다.
영화 최후반부까지 흘러가게 되면 섭은낭은 자신에게 전계안을 암살하라고 명령했던 사부에게 [후계자가 아직 어려 위박이 위태로워질 수 있어서 차마 죽이지 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지게 되는데요. 이 때 초반부의 아이가 예뻐서 차마 아비를 죽일 수 없었다는 부분과 교차되며 섭은낭이 전계안을 정말로 사랑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마지막 씬에서 천천히 산자락 아래로 사라지는 섭은낭의 뒷모습을 보면서 섭은낭의 행동들의 의도가 퍼즐 맞추듯이 끼워 맞춰지기 시작하죠.
이런 식의 유장한 흐름은 흡사 한시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한시는 5글자 혹은 7글자 등으로 매우 짤막한 행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은 그 말의 의미보다 훨씬 더 큰 배경을 가지고 있죠. 이 영화 역시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굉장히 노출이 적지만 그 뒤에 놓인 감정의 흐름은 이야기의 내용보다 훨씬 큰 지분을 차지합니다. 마침 영화의 제목도 딱 5글자네요.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돋보이는 부분은 미술입니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당나라(당나라 치고 옷은 별로 안 야하다만...)의 색채를 이 영화는 아주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어 눈요기용만으로도 아주 그만입니다. 무심히 흐르는 자연 경관도 하나하나 예술 사진이 될 정도로 로케이션에도 크게 신경을 썼구요. 어느 장면 어느 숏을 캡쳐해도 바탕화면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미장센만큼은 그 어떤 영화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영상미가 말도 안 되게 느린 영화의 호흡을 감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영화를 보는 100분 여 동안 하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하며 한숨 짓다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왜 이 영화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환희와 함께 인생무상의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영화를 통해서 사람을 수양시키다니 역시 동양의 예술답네요 돈오점수의 미학이랄까 (미침)
★★★★☆
외화 | 1741명이 읽었어요. 18.191.8.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