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 출신 사나이다. 롯데 팬이란 얘기다. 1982년 개막식에 아빠 손 붙잡고 갔던 한 어린아이는, 커서 롯데 클래식 져지를 입고 손민한의 복귀를 바라며 이대호, 최동원 이야기에 거품무는 열성 팬이 되어버렸다.
나는 공부를 좀 하는 편이었다. 지방의 고등학교라는게 좀 흠이긴 해도, 반에서 순위권에 드는 것은 물론 모의고사를 볼때면 종종 전교 등수에도 이름을 올리곤 했다. 그다지 명문이라고는 평가받지 못하던 대학이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성' 한 것이 결정난 합격자 발표날에는, 무뚝뚝하고, 남자다움을 강조하셨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기도 하셨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 부모님의 연고지도 서울이고,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친구들 중에 롯데 팬은 매우 드물었다.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같은 야구 팬으로서 우리는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과연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수도다운 화려함과 세련됨을 가져다 주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남자다움'은 나의 첫째가는 미덕이 되었다. 좀 촌스러워 보일 수 있다고는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 의사, 변호사의 아들인 서울의 친구들을 대할 때, 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으로는 도저히 도시의 삶을 버텨낼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지탱하게 한 나의 '깡', 일진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했던 나의 '순수한 남자다움'을 연기하는 것이 다시금 도움이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서울의 여자친구는 생기지 않았지만.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그저그런 중소기업이기는 해도 '서울의 직장'을 얻어 아버지의 자부심에 완전무결함을 더해드릴 수 있었다. 부산의 아버지는, 지금도 '서울에 사는'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우시단다. 서울의 아들이 서울 친구들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면서도, 짐짓 '서울의 촌스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까. 아마 아버지도 똑같이 행동하셨을 거라 생각한다. 부산 남자니까.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 야구장엘 갔다. 부산 남자들의 자부심, 야구는 못해도 응원문화와 집단의식만큼은 세계 제일이라는 - 굳이 3구도, 오사카와 보스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 당당함을 마음껏 뽐내며 그들에게 '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제격이라 생각했다.
한 놈은 엘지를 응원하는 윤호(계집애같은 놈), 또 하나는 내가 언제나 연정을 품어왔지만 도저히 고백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아 내 마음을 숨겨오기만 했던 '학번 퀸카' 두산팬 보연이었다. 윤호 이 놈은 좀 빠져줬으면 좋았을 걸. 뭐, 그래도 사실 이 놈이 없었으면 나도 너무 긴장해서 지금처럼 마음껏 웃지도 못했겠지만..
롯데가 이겼다. 롯데의 응원이 이겼고, 부산이 서울을 이겼다. 너무나도 기뻤고, 세상이 다 내것같은 기쁨에 눈물이 흘렀다. 롯-데 롯데롯데롯-데-, 롯-데 롯데롯데롯-데- 아, 승리의 롯데여. 이 계집애같은 서울 놈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낭만을 간직한 '부산 사나이'들을 이길 수 있을리가 없지. 하하, 웃음이 나온다.
신천으로 조금 걸어나가, (그곳은 온갖 네온사인이 가득한 별천지였다) 우리는 작은 고깃집에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조금은 격앙이 되었는지, 침이 마르도록 롯데의 위대함과 부산 남자들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내게 보연이는 호감이 간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행복하다. 윤호는 좀 꺼졌으면.
그렇게 몇시간이나 흘렀을까. 어? 분위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상하게 됐지? 너무 떠드느라 보연이의 표정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변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차, 나의 실수. 그래도 이제부터 만회할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했다.
"저기.." 보연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한데;; 지금 버스시간 다 돼서 가봐야되거든.. 그런데 창식이 네가 너무 얘기를 신나게 하길래 분위기 깨기가 뭣해서..ㅠㅠ;; 미안해, 지금 뛰어가야 겨우 막차시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미안 정말 미안 ㅠㅠ 먼저 갈께."
미안했다. 내가 눈치없이 떠드느라 이 천사같은 아가씨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버렸구나.. 그래, 남자답게 사과하고 쿨하게 보내주는게 부산의 법칙이다. 이제 내 눈앞엔 재수없는 강남의 줄무늬 유니폼만 남았다. 그래, 윤호 이 놈 아버지가 뭐라더라.. 강남에 빌딩을 소유한 중견기업의 오너라고 했다. 쳇, 성격은 계집애처럼 살살거리기만 하는 놈이.. 이 놈과의 술자리는 재미가 없다. 남자답게 왁자지껄 욕설을 섞어 이야기를 해도, 욕에 게걸진 액센트를 넣지 않고 젠체하는 서울 말투는 어쩐지 위축되는 느낌이 들어 더더욱 싫다. 욕은 욕처럼 해야지 말이야. 쩝, 보연이나 데려다 줄 걸. 아, 아직 안 늦었나..? 그래도 뭐, 이미 쿨하게 보낸 마당에 쫓아가는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부산 남자다운'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 없어 보인다.
"나, 화장실 좀 갔다올께" 윤호가 말하며 일어났다.
그래, 다녀와, 라고 말하며 나는 고기 2인분과 소주를 추가주문했다. 뭐, 까짓거.. 그런데 윤호 놈, 이상하게 되게 서두른다. 화장실이 급했나?
..
문자가 왔다.
「미안, 나 일이 생겨서 먼저 좀 가봐야겠다;; 내일 연락할께」
나는 추가한 소주의 뚜껑을 열었다. 아줌마,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오.. 개같은 연놈들 임신이나 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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