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실력이 강할수록 이쪽의 승률이 떨어진다는 것은 승부를 겨루는 모든 형태의 경기에서 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예선전에서 약한 상대와 겨룰 때, 정규리그에서 하위팀과 많은 경기를 가질 때, 국내대회에서의 승률 보다는 ... 국제대회에서 세계의 강자와 만날 때, 본선, 결승전에서 최고의 상대들과 겨룰 때, 메이저에서, 포스트시즌에서 최고의 팀들과 겨룰 때 승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쪽이 강한 만큼 상대도 강하고, 이쪽이 질수 없는 승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만큼 상대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져서는 안 되는 승부, 중요한 승부, 중요한 순간에 더 강하다, 강자에게 더 강하다 라는 말은 인상비평적 수사는 될 수 있어도 통계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클러치 히팅이 통계적으로 입증된 바 없고, 통산전적으로 볼 때 정규리그보다 포스트시즌에 더 높은 승률을 올리는 팀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
1993년 이래 세계최고의 기사로 변함없이 군림하고 있는 이창호라면 어떨까. 과연 이창호는 이쪽이 강한 만큼 상대도 강하고, 이쪽이 질수 없는 승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만큼 상대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승률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는 기본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가 될 수 있을까.
프로기사에게 큰 승부라면 역시 메이져(제한기전, 속기전, 소규모 임시대회 등을 제외한 응씨배, 후지쯔배, 삼성화재배 같은 대형 기전을 말합니다)국제기전 결승전이 되겠다.
개인의 명예, 국가의 명예, 상금과 기타 등등 ... 메이져 국제기전 결승전 기록, 즉 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승부에서, 그의 성적을 좀 들여다 보자. 일단 이창호의 메이져기전 결승전 진출횟수는 18회이며 그 중 16회 우승하고 있다. 그의 평소 국제대국 승률은 78% 이지만, 결승전에서 승리확률은 88.9% 로서 거의 90%에 육박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놀랍다고 할 수 없다. 결승전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기사끼리 겨루는 경우와 외국기사와 겨루는 경우로 나올 수 있는데 18회 중 5회는 한국기사와, 13회는 외국기사와 겨루고 있다. 한국기사끼리 겨뤄서 바둑팬 입장에서 보자면 누가 이기더라도 큰 상관이 없는 경우 ... 를 뺀 나머지 13회에 걸친 진검승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992년 3기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임해봉(일본) ☞ 이창호 3:2 우승
1993년 4기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조치훈(일본) ☞ 이창호 3:0 우승
1996년 7기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마효춘(중국) ☞ 이창호 3:1 우승
1996년 9회 후지쯔배 - 이창호 vs 마효춘(중국) ☞ 이창호 1:0 우승
1997년 2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고바야시 사토루(일본) ☞ 이창호 3:0 우승
1998년 11회 후지쯔배 - 이창호 vs 상호(중국) ☞ 이창호 1:0 우승
1999년 3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마효춘(중국) ☞ 이창호 3:2 우승
1999년 3회 LG배 - 이창호 vs 마효춘(중국) ☞ 이창호 3:0 우승
1999년 4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조선진(일본) ☞ 이창호 3:0 우승
2001년 4회 응씨배 - 이창호 vs 상호(중국) ☞ 이창호 3:1 우승
2003년 1회 도요타배 - 이창호 vs 상호(중국) ☞ 이창호 1:0 우승
2003년 3회 춘란배 - 이창호 vs 하네 나오키(일본) ☞ 이창호 2:0 우승
13전 전승!
78% -> 89% -> 100% ... 오호라 ...
국가대항전이라 할 수 있는 단체전 국제대회 최종국의 결과도 의미심장하다. 바둑에서 메이저급 국가대항전은 보통 승발전 방식으로 치러지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긴 사람이 다음 기사를 맞아 계속 대결하는 ... 무협지 스타일.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모두 떨어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두 기사의 마지막 대국이 최종국겸 결승전이 된다.
한국팀의 단체전 최종국(주장or마지막주자)은 보통 조훈현이나 이창호가 맡는데, 그 중 이창호가 최종주자로서 대국한 경우를 보자. 그런 경우는 이제까지 모두 여섯 번.
1993년 2회 진로배 최종국 - 이창호 vs 다케미야 마사키(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1999년 1회 신라면배 최종국 - 이창호 vs 마효춘(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0년 2회 신라면배 최종국 - 이창호 vs 가토 마사오(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1년 3회 신라면배 최종국 - 이창호 vs 주학양(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2년 4회 신라면배 최종국 - 이창호 vs 나선하(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3년 5회 신라면배 최종국 - 이창호 vs 임해봉(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이창호는 반드시 이겨야 할 최종전에서 모두 이겼으며 ‘이창호까지 지면 우승컵을 넘겨주게 되는’ 중요한 대국에서 10연승(현재진행형)을 기록하고 있다.
6전 전승 & 10연승!
일본이나 중국의 프로기사들이라고 왜 이기고 싶지 않겠으며, 어찌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갈망이 없었으랴 ...
이창호가 나쁜놈이지.
ps. 이창호는 국제대회 개인전에서 21차례 우승하고 있다. 그의 개인전 우승 횟수는 중국 또는 일본의 역대 우승횟수보다 많으며, 메이져 대회 개인전 우승횟수는 중국과 일본의 우승횟수를 합한것 보다 많다. 또한 이창호의 승수 및 우승횟수를 제외했을 경우 비로소 한국의 승수와 우승전적이 중국, 일본과 비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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