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아름다웠다. 관중석은 경기장과 맞닿아 있었고 잔디 상태도 완벽
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대전 관련 회의에서 만난 이탈리아 팀 관계
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은 오늘 밤 경기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구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경기장으로 걸어나왔다. 워크맨의 이어폰을 귀에 꽂은 이
들은 무척 자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몇 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눈에 띌 정도로 침착해
졌다. 4일 전에 있었던 포르투갈전과의 차이점을 의식하게 되었다. 모
든 면에서 대한민국 팀의 전력은 후퇴한 것처럼 보였고 불필요하게 볼
을 뺏기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일어났다. 페널티 지역에서 갑자기 설기현
이 이탈리아 수비수에 의해 쓰러졌다. 에콰도르 출신의 바이론 모레
노 주심은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볼을 11m 위치에 놓았다. 페널티
킥 판정이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주심에게 몰려들어 거세게 항의했
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키커로 선정된 안정환이 볼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슈팅의 화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팀 골키퍼 지안루이
지 부폰이 볼을 막아냈다.
승전을 이어가리라는 나의 믿음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자리에 주저
앉아 계속 경기를 지켜보았다. 변화 없이 진행되는 경기에서 우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한 흥분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크리스티
안 비에리가 코너킥을 받아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스코어를 1-0을 만들
었을 때 우리의 운명은 끝나버리는 듯했다. 경기가 시작된 지 18분 만
의 일이었다. 나는 실망스러움을 느꼈고 거듭되는 우리 팀의 실수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선수단의 벤치는 조용했고 응원단도 조용했다.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정말 좋았었다. 16강 진출
의 목표가 달성되었는데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델 피에로, 토티,
비에리 등 이탈리아 공격수들은 2-0을 만들 기회가 있었지만 정확하
게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들 역시 8강 진출을 확신하는 듯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 시간에 나는 곧 가족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레이몬드와 함께 메인 스탠드 근처에서 물을 마셨다.
아마도 며칠 후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남은 일만 몇 가지 정
리하고 나면 부담스러웠던 2주일이 지나 다시 휴일을 보낼 수 있을 텐
데….
잠시 후 나는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탈리아
감독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스트라이커 델 피에로를 미드필더 가투소
와 교체했다. 옆에 있던 레이몬드가 혼잣말을 했다.
“트라파토니 감독이 1-0을 지키려고 하는 것 같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둬.”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히딩크 감독은 수비수 김태영을 스트라이커 황선홍으로 교체하며 응
수했다. 경기의 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팀은 찬스를 만
들어갔고 나의 믿음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관중들
역시 득점 찬스를 만들어가는 대한민국 팀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팀은 지쳐갔다. 파누치와 말디니 같은 나이 든 수비수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트라파토니 감독은 참브로타 대신
놀라운 주력의 디 리비오를 투입시켰다. 스코어는 아직도 1-0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작은 체구의 이천수를 투입시켰다. 남은 시간은 20분.
나는 계속 경기에 몰입했다. 아직 집에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아직 우리는 기적 같은 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득점 찬스를 만들어야 했다.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비에리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팀 골키퍼 이운재가 가로막았다. 히딩
크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일어났다. 온갖 제스처를 동원하며 뭔가를 지
시했고 고성을 질러댔다. 이탈리아의 트라파토니 감독도 마찬가지였
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행동을 보이기도 했
다. 스코어는 아직도 1-0이었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규정 시
간 5분과 인저리 타임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8강 진출로
부터 멀어져갔고, 내 경우는 계약의 종료 시점이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었다.
나는 경기장의 전광판 시계를 쳐다보았다. 경기 88분 경과를 알리
고 있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
은 수비에 특히 강한 팀이었고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는 팀이었다. 그
러나 정교한 대한민국 팀의 패스에 이탈리아의 수비는 흔들렸다. 설기
현이 흘러들어 온 볼을 받아 왼발로 슈팅을 했고, 볼은 부폰 골키퍼
의 왼쪽을 통과하여 이탈리아의 골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몬드와 나
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서로의 품에 안겼다.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었
다. 8강 진출의 희망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설기현이 이번 월드컵
에서 처음으로 성공시킨 골이었다. 얼마나 멋진 골인가!
이탈리아 선수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몇몇 선수는 머리를 움켜
쥐기도 했다. 그들의 월드컵 드림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이탈리아의 왼쪽 측면 공격이 이어졌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
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볼이 비에리의 오른발 앞에 멈춰 있었다. 경
기 시작 후 정확하게 90분이 경과된 시점이었다. 골은 텅 비어 있었
고 대한민국의 골키퍼 이운재가 앞에 있었다. 비에리가 슈팅을 하기
전 볼이 약간의 바운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바운드
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비에리가 찬 볼은 크로스바를 넘어가
고 말았다.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백 번에 아흔아홉 번은 비에리가
눈을 감고도 골을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벤치는 황
량해졌고 상처를 받은 비에리는 한참 동안 그라운드에 누워 있었다.
곧이어 바이론 모레노 주심이 휘슬을 불어 후반전 종료를 알렸다.
이제 서든데스제가 적용되는 연장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느 팀이 먼
저 골을 넣을 것인가! 레이몬드와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기로 했
다. 대전월드컵경기장은 온통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대전 전체가 흔
들렸고 모두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했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미래에 대한 생각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도 들지 않았다.
다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
는 느낌이었다. 서든데스제는 스포츠 경기에서 극단적인 대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 그리고 승리와 패배의 차이가
그토록 작은 것이다. 이탈리아가 공격을 할 때는 숨이 멎는 것 같았
다. 단 한 번의 실수만 있어도 그대로 끝나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팀 페널티 지역으로 볼을 드리블해 들어가던 토티가 넘어졌다. 페널티
킥일까? 분명 그렇지 않을까? 모레노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는 가슴에 있는 포켓에 손을 넣어 프란체스코 토티에게 레
드카드를 보였다. 그 상황을 이해하고 나자 나는 당황했다.
“두 번째 경고야!”
레이몬드가 외쳤다.
“이제 퇴장이야!”
이탈리아 팀 스트라이커 토티가 의도적인 파울 유도로 두 번째 경고
를 받게 된 것이다. 축구계 속어로 ‘Schwalbe’(영어로는 Swallow,
이른바 할리우드 액션을 말함)를 범한 것이다. 극도로 화가 치민 트라
파토니 감독은 물병을 걷어찼다. 이탈리아 벤치에서는 FIFA 관리와 함
께 TV 모니터를 통해 문제의 장면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토티
가 팔을 흔들며 쓰러지는 모습이 명확했다.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경기는 다시 진행되었고, 연장전의 전반은 득점 없이 끝났다. 진영
이 바뀌고 연장 후반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팀의 기세는 현저히 떨
어졌다. 선수 한 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싸우는 이탈리아 팀은 거의 하
프라인을 넘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페널티킥이라도 유도해 보려는 모
습이 역력했다. 대한민국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볼은 왼쪽 사이드로부
터 페널티 지역으로 날아들었다. 골문 앞 6m 부근에 있던 안정환이 점
프했고 이탈리아 수비수 파올로 말디니가 그 짧은 순간 볼을 시야에
서 놓쳤는데 그가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볼은
안정환의 머리를 스쳐 부폰 골키퍼의 왼쪽 골문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절대로 잊지 못할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내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 경기장은 한참 동안 마비가
된 듯했다. 나는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대한민국 측 고위 관계자
들과 포옹했다. 그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는 표정이었지만 그 눈 속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
다. 특히 전반전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
다. 나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선수들 곁으로 가고 싶었다. 모두
들 기쁨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경기장에서 나는 히딩크 감독
이 이 예상치 못한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지 바라보았다. 도그
아웃에 있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기쁨의
세레머니가 계속되었다. 내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려댔지만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다시 안정을 찾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
요했다.
선수들은 경기장을 나와 대기실로 갔고 히딩크 감독도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 나의 팔을 꼭 잡았다. 내 시선은 정몽준 회장
의 눈과 마주쳤다.
“같이 가시죠. 관중들에게 인사를 해야죠.”
현대그룹의 총수와 내가 경기장으로 다시 나가는 동안 대한축구협
회 관계자들과 경호 요원들이 뒤를 따랐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관
중들에게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참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는 선수대기실로 돌아가 선수들과 함께 축하를 나누며 내 일을 하고
싶었다. 특히 취재진을 보살펴야 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
회장이 내 팔을 꼭 잡고 있었다. 관중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얀 선생,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세요. 히딩크 감독이 이 자리에
없으니 당신이 손을 흔들어주셔야죠.”
그는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자신이 경기장을
돌며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찍을 것이고 자신의 인기가 올라가
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경기장을 반쯤 돌아 이탈리아 팀 응원석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심판의 판정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응원단의
느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Fuck you, Korea, Fuck you!”
그들은 우리와 함께 가고 있던 관계자들에게 침을 뱉었다.
-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분석관 얀 룰프스 -
KBO | 1778명이 읽었어요. 3.147.43.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