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물 야구' 마시며 피어난 잡초
가장 '돌핀스스럽던' 유격수 염경엽
짠물 수비의 핵, 염경엽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김재박, 류중일, 이종범, 그리고 박진만 중 누구를 꼽는가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세대와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네 선수라면 각기 조금씩 남고 모자라는 면면이 있어야 있겠지만, 종합적인 평가로서 쉽사리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선수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듣는 이의 절반쯤은 비웃을 것을 각오하고 마음속 생각을 말해보면, 이 네 사람에 염경엽을 더해 다섯명으로 '수비 시합' 을 시킨다면, 염경엽이 절대 꼴찌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물론 '화려함' 이라는 면에서 염경엽이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미 반쯤은 외야로 뚫고 나가는 타구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표범과 같은 다이빙캐치,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나 총알 같은 송구로 1루수의 글러브를 정확히 파고들어 반의 반 걸음 늦게 베이스를 밥은 타자가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드는 순간, 그래서 '그림 같다'는 말 뜻을 심감나게 하며 양쪽 팀 응원단 모두에게 탄성을 끌어냈던 김재박과 이종범의 플레이야말로 웬만한 런 몇 개와 바꾸지 않을 야구의 매력,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것 한두개 쯤 놓치더라도 결정적인 것을 잡아내 벌충한다고 된다고 생각해도 좋은 강팀의 유격수에게나 어울리는 여유린지도 모른다. 혹시 다른 팀보다 휠씬 가벼운 방망이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허약한 타선에서 한 점이라도 내줄 때까지 끝내 버텨야 했던 돌핀스 수비에서,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은 투수들이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공 한개라도 더 집중해서 던지도록 떠받쳐야 했던 야수에게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 힘 빼지 않는 '깔끔한 수비'였다.
1994년, 타이거즈의 2년차 이종점은 시즌 내내 4할을 넘나드는 타격 솜씨와 함께 신들린 듯한 수비 실력으로 스포츠 뉴스의 첫 소식과 마지막 명장면을 도맡았다(최종 0.393). 그리고 그에게 바칠 독창적인 찬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야구해설가들을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던 최구의 유격수인 그가 저질렀던 실책은 27개였다. 그러나 그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돌핀스 유격수 염경엽의 실책은 단 여덟개였다.
그해, 이종범은 그에게로 타구가 날아 갈 때 마다 명장면을 기대하게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염경엽은 자신을 향해 타구가 날아갈 때 마다 팬들로 하여금 반사적 아웃카운트 하나를 셈하게 하는 선수였다. 1994년 돌핀스 내야진의 핵은 염경엽이었고, 그가 만들어낸 미묘한 변화에서 비롯된 '돌풍'은 준우승이라는 '태풍'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통산 1할대 타자. 완전한 '반쪽'
1996년에 팀은 현대로 옷을 갈아입었고, 신인 시절잠시 같은 포지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재박이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염경엽의 모습은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인천고를 졸업한 박진만이 들어와 김재박의 '7'을 물려 받았고,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스승 김재박을 떠올리게 하는 '센스'와 2할 8푼대의 옹골찬 방망이로 유격수 자리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박진만이 2년차 징크스를 심하게 앓으며 역대 최저 타율 (0.185, 351타수 65안타)신기록을 세우는 동안에도 염경엽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염경엽의 방망이라 한들 그것보다 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6년과 1997년, 주로 대수비와 대주자로 간간히 그라운드를 밟은 염경엽에게 간혹 부득이하게 타순이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128경기, 32번의 타수가 주어진 그 두해 동안 그는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996년~1997년 총 3번의 출루, 11삼진, 도루 3개, 도루자 10개, 1타점)
그가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렸던 1994년 역시(74개), 그의 성적은 규정 타석을 세운 모든 타자 중 마지막 순번이었다(0.212). 그리고 10년간의 개인 통산 타율 역시 2할을 넘기지 못했다(0.195). 흔히 '반쪽짜리 선수'라표현을 쓰지만 염경엽처럼 완벽하게 반쪽으로만 존재하는 선수는 이제껏 없었다. 타선에서 그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사실 원래 그는 꽤나 재능 있는 타자였다. 청소년 대표팀을 오갔던 광주일고 시절을 거쳐 고려대에서 3번을 치며 단기 리그 타격상도 심심치 않게 받았던 아마추어 시절, 타격에서 그의 재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빈약한 체구와 체력, 그리고 소심한 성격은 결국 나무 배트와 변화구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소리 없이 팀의 전성기를 떠받쳤던 한 재능 있는 유격수는 그렇게 별다른 부상도 없이 사라져갔다. 물록 주목받지 못한다 해서 지레 손을 털 리 없는 잡초였기에 눈에 띄지 않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분주했다. 팀이 한두점 앞선 경기 종반이면 감독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수비 요원이 그였고, 그는 그런 기약 없는 부름을 위해 유격수, 2루수, 3루수, 혹은 외야수까지 수비 훈련을 했고 또 나가서 한순간을 질주했다. 그리고 타격에서도 특별한 한순간의 대타 역할을 다하기 위해 빠른 발을 이용할 수 있는 스위티히터로의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재박과 박진만이라는, 전설적인 두 명의 유격수가 주고받은 계보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의 기회를 잡지못한 그는 2000년을 끝으로 그야말로 '가늘고 길었던' 10년의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2001년 4월 5일, 수원 개막전에서 그를 위한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날을 대투수 정명원(태평양&현대 1989-2000)의 은퇴식으로만 기억한다. 아마도 정명원이라는 대스타를 위한 행사에 더불어 한 자리를 붙이지 않고는 허락되기 어려웠을 영예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꼴지, 조용하게 바쁜 잡초
원래 꼴지는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진지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돌핀스도 어찌 보면 많은 팬을 가진 팀이었다. 그러나 돌핀스라는 팀을 가장 많이 닮았던 염경엽이라는 선수의 이름에서 깊은 감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돌핀스를 사랑했던 사람은 아마 아닐 것이다.
염경엽은 결코 1등이 아니었고, 심지어 기필코 1등이 되고 말겠다고 발버둥친 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흘린 땀방울은 흔히 눈에 띄지 않은 곳에 기름진 거름으로 뿌려졌다. 그래서 1994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수들을 떠받치고 팀을 준우승까지 밀어올렸고,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기에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대신 걸었던 구단 직원의 길에서 해마다 훌륭한 외국인 선수들을 가려내 1차 지명권이 없어도 팀이 꾸준히 상위권을 지킬 수 있게 했던 것도 그렇다. 그리고 자신의 은퇴식 날 이제 필요 없게 된 야구 용품을 팔아 마련한 500만 원을 한 해 전 쓰러진 대학 후배 임수혁(롯데 1994~2000) 선수를 위한 성금으로 내놓으며 주변의 관심을 환기시켰던 일에서도, 우리는 새삼 그의 공로를 발견하게 된다.
2007년 시즌, 유니콘스의 김시진 감독은 지도자 경혐이 전혀 없는 그에게 1군 수비코치의 대임을 맡기는 파격을 단행했다. 망한 지 3년이 이미 넘어가고 있는 부잣집 현대의 상황이 어느새 돌핀스의 1990년대 초반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느 해보다 일찍 닮아버린 투수들의 어깨와 불투면한 팀의 미래와 더불어 내야진에 큼직하게 뚫려 있는 수비의 구멍들 탓이 적지 않았다.
'돌핀스 유민'을 자처하는 내가 드물게 배정되는 유니콘스의 경기 중계를 빼먹지 않으려 애썼던 이유는 사실, 이숭용과 김수경 때문이라기 보다는 염경엽 코치 때문이었다. 이따금 경기가 꼬일 때마다 비치는 더그아웃 풍경 한 구석에서 제 잘못인 듯 미간을 구기고 있는 그의 얼굴이, 지고 또 지는 나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껄끄러움 없이 한 팀을 응원하는 것으로 상쾌하고 개운했던 도원야구장의 한 철을 참 그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출처 : 책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 김은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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