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일본에서 잘 다니던 직장, 식당한번 해보려고 그만두고 와이프 친정쪽 지역으로 이사까지 와서 가게 알아보고 계약까지 한 시점에 와이프 친척쪽 한분이 돌아가셔서 (정확히는 와이프 외할머니의 동생분) 장례식에 있다가 쉬는 시간이 좀 있었는데 참..... 사람 촉이라는게 희한하지 이상하게 친형한테 연락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형한테 연락했더니 처음에는 뭐 안부 주고 받다가 형이 갑자기 'oo야 잘 들어 형이 지금 많이 안좋아..' 순간 든 생각은 뭐 사기라도 맞았나? 아니면 뭐 코인이나 주식으로 뭐 날렸나 싶었는데 코인이나 주식은 할 사람은 아닌걸 아니까.. 뭐지??라고 생각하면서 '뭔데?' 라고 물으니 '형이 암이야 말기..'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우리 어머니 쪽이 전부 암이다. 이런걸로 유전이 쎈걸 나도 알곤 있었지만 그냥 잊고 살았고.. 하지만 내 입에선 아직 부정적 대답이 나왔다 '만우절 아직 멀었어 뭔 뜬금 없는 소리야..' 거짓말 이길 바랬다 아니 정말로 그냥 '야 농담이야' 라고 해주길 바랬다.
얼마동안의 침묵 속에 나는 형이 흐느끼는 소리를 전화기 넘어로 들리자 나도 울음이 터져버렸다... "아 왜 진짜 왜! 왜!" '왜' 라는 대답 밖에 안나왔다. 인정하기 싫었다 어머니를 데려갔고 어머니쪽 식구분들까지 힘들게 했던 암이라는 병이 이젠 우리 형까지 데려 가려고 하는게.. 한참을 둘다 울었다 조금 진정이 되고 지금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한국으로 귀국 했다.
인천공항에서 형 집 근처 정류장까지 도착하자 형이 마중나와 있었다. 겉으로 보면 말기 암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평소의 우리 형 모습이였다. 형은 결혼해서 얘들이 셋이다 아직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 막내부터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둘째 초등학교3학년인 첫째까지.. 속으로 얼마나 형이 마음이 무거울지 상상도 안됐다. 한국에 도착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대식구가 밥까지 같지 먹고 평소와 똑같았다. 마치 형이 암이 걸린게 아닌 것 처럼..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역까지 태워주던 형의 차 안에서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던게 맞다. 단 말 한마디에 이미 울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였으니까 역에 도착하고 짐을 꺼내주던 형을 뒤에서 보던 나는 결국 터지는 울음을 이기지 못했다. "형 제발 살아줘 치료 잘 받고 이겨 낼 수 있어" 이 말을 또박또박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눈물 콧물 범벅이 되서 엉엉 울다 싶히 했으니까. 형은 울지 않았다 그저 울음이 터져버린 동생을 꼭 안아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형도 살고 싶다."
그렇게 형을 먼저 보낸 후 역 앞 계단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후 겨우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와이프도 한참을 같이 울었다.. 돌아온 뒤 형과는 꾸준히 연락했다.
4월 가게 준비 한창인 중에 어느 날 뭔가를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몸이 안좋았다 새벽 내내 구토와 설사를 반복.. 아침까지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장모님은 장모님 친구분이 간호사로 계시는 병원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접수를 끝내고 대기하던 중 장모님 친구분이 와이프 목 쪽에 있는 응어리를 보시더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통증은 없는지 자세하게 물으시고는 이왕에 온 김에 검사 한번 받아 보자 했다 사실 나도 목 쪽에 응어리는 알고 있었고 계속 병원에 가자 소리도 쳐보고 화도 내보고 달래도 봤지만 결국 병원에 가지 않아서 나도 포기 했던 참이였다 나는 금방 회복 되었지만 와이프는 정밀검사 소견이 필요했다 정밀 검사 결과 림프암 4기 나는 그때 와이프와 같이 병원에 가지 못하고 가게 오픈 준비 때문에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였다.
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통화가 끝나고 주저 앉아 울었다. 와이프는 불행중 다행으로 암은 호지킨으로 진단됐다. 모든 암 중에 예우가 좋고 와이프 나이때라면 완치도 가능한 암이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게는 오픈했고 형에게는 와이프가 암이라는 것을 한동한 말하지 않았다.
5월.. 와이프의 항암 시작과 동시에 와이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원채 몸이 좋지 않으셨고 외할머니의 동생분이 먼저 가시는 걸 본게 아마 충격이 크셨던거 같다. 와이프도 충격이 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보고 안아주는게 해줄 수 있는게 전부였다. 나도 가게 운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점점 지쳐가고 와이프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받아 주는 것도 조금씩 지쳐갔다. 항암 부작용으로 몸의 있는 털은 빠지기 시작했고 집에서 한발짝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병수발은 장모님이 맡으셨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6월 형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가게를 잠시 쉬고 한국을 갔다왔다 가기전 와이프의 상태를 결국 형에게 말했다. 어차피 보면 알게 될 상태였으니.. 형은 아직 암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른 환자처럼 움직일 수 없거나 복수가 차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힘들어 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이 정도라면 암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속 사정은 달랐다.. 이미 뼈까지 전이된 암들은 형의 생명을 갉아 먹고 있었고 항암제를 무려 3번이나 바꿨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항암을 시작하면 몸이 아픈게 정상이였지만 형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고 그 말은 그 어떤 약도 항암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형은 어떤 암이라고 정확히 진단 받지 못했다 이미 전신으로 퍼져버린 암이 어디서 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암부터 치료해야 할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였다. 결국 폐까지 전이가 되어 숨쉬는 것도 힘들어 했고 기침이 멎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오기전 버스정류장에서 형이 웃으면서 해준 말을 아직도 잊지 않는다. "괜찮아. 이겨낼꺼야, 제수씨 네가 잘 챙겨줘야 돼" 가는 길에 쓰라며 돈까지 챙겨줬다. 하... 그냥 두고 올려는 것을 내 가방까지 뒤져가며 꼭 돈 봉투를 넣어줬다. 나는 아직까지 이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찍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내것이라는 것 하나 없이 열심히 살아온 형이였다.
형이 암이라는 소식에 결혼식때 선물로 받았던 성경책을 펴놓고 항상 기도 했다 데려가지 마시라고, 하나뿐인 형이라고 적어도 첫 애 결혼식 까진 보고 데려가시라고, 그렇게 기도 했다.. 사실 나도 계속 알아는 보고 있었다. 와이프까지 암에 걸리자 이것저것 안찾아 본게 없었다. 하지만 뼈가지 전이된 암 환자에게 기적은 없었다. 현실은 알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랬다.
7월 와이프 오빠가 풍으로 입원했다. 고도비만 환자였지만 결국 수술까지 받았다. 멘탈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였다...
8월.. 형은 결국 항암 자체가 듣지 않자 기도원으로 가기로 했다. 가기전 통화도 했다. 기침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25일 형수한테 연락이 왔다. "도련님 형이 지금 많이 좋지 않아요 중환자실 들어갔어요" 전화도 왔지만 일 떄문에 받지 못했다. 나는 이 메세지를 늦게 확인했다. 처음에는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몇번의 시도 후 형수님이 전화를 받았다. 서로 울었다.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한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장모님이 운전을 해주셨다. 와이프는 몸 상태 때문에 같지 가지 못했다. 입국 수속 후 시간이 남았다. 배는 고팠다. 푸드코트에서 라면을 시켰지만 결국 몇 젓가락 먹지 못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마자 울음이 쏟아졌다. 괜찮을거라 계속 생각했지만 아마 마음속으로는 이미 무너졌다.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마침 다행이 그날이 일주일에 두번 있는 면회날 이였고 한 사람당 15분만 면회가 가능했다. 환자 이름을 확인하고 '몇번째 줄 몇번 침대 입니다.' 라고 안내를 받았지만 나는 형을 처음에 지나쳤다.
침대를 몇번 건너 뛰니 아니다 싶어 뒤로 돌아 갔을때 형의 모습보다 형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형의 모습이 아니였다. 그래서 지나쳤다. 내가 알던 형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미 지쳐버릴 때로 지쳐버린 형의 얼굴이 보였다. 의식은 없었다. 자가호흡은 하지 못했고 손을 잡아봐도 얼굴을 쓰다듬어봐도 형은 반응하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면회시간이 끝났다.
얼마후 담당교수님과 면담이 있었다. 형이 많이 버텨주었다는 것과 아마 더이상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는 말고 함께. "다음 면회일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을때. '글쎄요...' 라는 말을 듣고 나는 형이 얼마 버티지 못할거라는 것을 알았다. 몇시간 뒤 형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연명치료 포기 서명도 한 시점이였다. 간호사 분이 '가까운 친척분들 혹은 지금 오실 수 있는 분들 명단 작성해 주세요.' 급하게 연락을 돌렸다. 결국 모든 사람이 모여 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켰다. 나중에 무덤덤하게 교수님이 오셔서 사망시간을 알려주신게 기억에 남아있다.
형의 정말 친한 친구들도 와서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결국 형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다. 병원 원칙상 친족들만 면회가 가능했기에 형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고 내심 불만을 토해 냈지만 그게 다였다. 형의 장례식장을 결정하고 수의와 기타 등등을 결정했지만 내심 이 상황이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그냥 움직였던거 같다. 원래데로 라면 형의 첫째 아들이 상주를 받아야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받지 못하고. 아버지도 받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하거나 형수님이 했여야 하는데 상황을 말씀드리니 형수님이 하겠다고 했다.
입관식때 형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진행해주시는 분이 펜을 들고 나에게 관에다 형의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동생은 동생인가 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지목해서 이야기 한거 보니.. 다리가 풀리고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 갈때 팔이 떨려서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한 없이 울었다 울었다기 보다 통곡이 맞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진짜 형이 갔구나..이게 진짜 마지막이구나' 발인 때까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발인날 나는 형의 사진을 들고 화장터로 향했다. 그렇게 한줌의 재가 되어 작고 작은 항아리에 담겼다.. 담기 전 마지막 온기도 느꼈다...
그렇게 작은 항아리에 담긴 형은 마지막으로 생전 있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사돈총각과 술한잔 했다 맛도 좋았고 많이 웃었다. 다음날 납골당으로 향해야 하는데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결국 납골 후 몸이 버티지 못했다. 나는 형수님이 일하시는 병원으로 가서 결국 코로나로 진단 받았다. 허.. 참.. 마지막까지 민폐를 끼치고 귀국 했다.
아직 한달도 안됐다... 그냥 형이 보고 싶다..
3768명이 읽었어요. 216.73.216.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