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과 가족들이 아직 교정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주차 방지턱에 걸터앉은 사진사 정모(53)씨는 짐을 챙겨 자리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씨는 오늘 작심을 하고 대학 졸업식장을 찾아왔지만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 한 채 발길을 돌려야했다.
대학 졸업식장의 감초와도 같은 사진사들이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맥을 못 추고 있다.
저마다 디지털카메라로 무장한 신세대 졸업생들이 대학 졸업식장의 사진사들의 자리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
20년 넘게 사진을 찍었다는 정씨는 "오늘 아침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지만 한 장도 찍지 못했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가서 사진관 일이나 해야겠다"고 맥없이 말했다.
대학 졸업식장 등 각종 행사장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이들은 대부분 사진 관에서 사진찍는 일을 겸업으로 하는 이들이다.
행사가 있는 날에는 가게 일을 제쳐놓고 한 몫 챙기기 위해 이곳 저곳 찾아다니 지만 요즘은 벌이가 영 시원치 않다.
사진사 송모(57)씨는 근처 잔디밭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담배만 연신 피워 물고 있었다. 다른 사진사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졸업생 일행에게 `사진 한 방 찍으라'고 권했지만 송씨는 그마저도 귀찮은 듯 했다.
"이전에는 졸업식장 한번 오면 적어도 20컷 정도는 찍어서 수입이 짭짤했죠. 그 런데 이제 하루 5컷 찍기도 힘들어요. 다 저 디지털카메라 때문이죠" 부모와 함께 누나 졸업식을 찾은 대학생 윤태종(23)씨는 사진사들의 카메라만큼 이나 값이 나가 보이는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가족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윤씨는 "사진사에게 찍으면 값도 비싸고 직접 찍는 게 마음에 든다"며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도 널리 보급됐고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우는 이들이 많아서 사진사들 이 더욱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가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잔디밭 한 쪽에서는 한 남자가 삼각대까지 갖춘 디지털 카메라로 졸업생 가족의 모습을 앵글에 담고 있었다.
이날 졸업식장에서 5컷을 찍어 그나마 소득을 올렸다는 사진사 정경길(57)씨는 "아무리 디지털 카메라가 좋다고 해도 필름으로 찍는 이 사진만 못할 것"이라며 "사 람들이 원판 맛을 모른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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