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군도를 봤습니다. 절취선 뒤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길어요
내 살다살다 윤종빈 / 하정우의 영화를 보고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거라곤 상상조차 못해봤는데 충격이네요. 감독과 배우의 필모그래피 역대 최악의 작품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망작이라 평가 받는 ‘비스티 보이즈’ 마저 너무나 좋아하는데, ‘군도’는 저주 받은 걸작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괴작 수준이에요. 도대체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만들었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계속 뜹니다.
일단 칭찬을 해봅시다. 강동원이 엄청납니다. 자태도, 연기도 훌륭해요. 그가 ‘최종 보스’ 역할에 이리도 잘 어울리는 배우인지 몰랐습니다. 그 고운 자태는 남심을 다 울릴 정도인데다, 후반부 엘라스틴 장면에선 여성들의 탄식이 상영관에 육성으로 퍼집니다. ‘그 더러운 모가지를 몸통에서 때어주겠다’ 는 대사를 칠 땐 스크린을 바라보는 내가 다 모가지를 때어내야만 할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와요. 이건 철저히 강동원의, 강동원에 의한, 강동원을 위한 영화입니다.
또한 액션 씬이 흥미롭습니다. 액션이 작살난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연출 방식이요. 이 영화의 액션은 노골적으로 어쌔신 크리드를 연상 시킵니다. 내가 겜덕이라 그런 것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아마 어쌔신 크리드(특히 에찌오 아우디토레 트릴로지)를 한 번이라도 플레이 해보셨다면 누구나 그 모방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종합예술로서 영화와 게임의 유사성이야 겜덕들 사이에선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게임이 영화를 닮아가는 것이 아닌, 영화가 게임을 모방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이 시사하는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겠죠.
칭찬은 여기까지. 이제 까봅시다.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은 뜬금 없는 나레이션에 당황합니다. 사극도 현대의 톤도 아닌 어색한 나레이션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빠삐놈 스타일의 BGM 이 잊을 만 하면 울려 퍼지는데, 이게 엄청 어정쩡하고 심지어 짜증이 날 정돕니다. 음향감독의 모가지를 베어 효수하고 싶어져요. 인물의 과거사를 왜 저런 식으로 지리하게 설명해줘야 하는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한 마디로, 구려요. ‘이게 최선입니까?’ 싶은 생각이 사라지질 않아요. 사극도 아니고 웨스턴도 아니고 개그물도 아니고 리얼리즘도 아니고 비극도 희극도 아닌 그 어정쩡한 어색함이 이 영화의 연출을 관통하고, 그 실패한 연출이 영화의 평이 개판인 이유일 겁니다. 사실 윤종빈의 연출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죠. 이야기가 가진 힘, 극도의 리얼리티, 캐릭터를 살리는 배우의 호연, 딱히 힘을 주지 않았지만 기억에 남아 회자되는 대사 같은 것이 윤종빈이라는 감독이 가진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그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어요. 스토리는 뻔하다 못해 엉성하고(이는 스포일러 때문에 뒤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강동원의 캐릭터를 제외한 모든 인물은 도무지 매력이 없습니다. 웃음이 터질만한 몇 씬이 있지만 그게 다에요. 비슷한 배경과 분위기를 가진 ‘관상’ 의 개그씬과 비교해 봐도 도통 재미가 없어요. 충분히 웃길만한 장면에서도 뭔가 부족한 연출이 발목을 잡습니다. 하정우는 분명 대단한 배우입니다. 몇몇 작품에선(특히 찌질한 역에서) 이 배역에 하정우가 아닌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이 영화에선 아닙니다. 돌무치 역이 반드시 하정우여야만 했느냐? 전혀 그런 느낌이 없어요. 이는 사실 주인공의 매력이 퍽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간 하정우의 배역 중 이렇게 매력 없는 캐릭터가 있었나 싶네요. 그나마 인상적인 건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 정도? 아, 그런데 강동원은 왜 전라도 나주에서 경상도 톤의 서울말을 쓰고 있는 겁니까?
감독을 위한 변명을 해봅시다. 이 영화엔 엄청난 투자가 들어갔고, 자연히 투자자의 압박이 있었을 겁니다. 윤종빈은 첫 메이저 영화인 비스티 보이즈에서 이 때문에 삽질을 한 전력이 있습니다. 사이즈가 큰 영화이니 흥행이 되어야겠죠. (최동훈이 망작 전우치에서 비슷한 결과물을 내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고 보니 전우치에도 강동원이 나왔군요.) 뭐, 본인이 웨스턴을 찍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문제는, 윤종빈은 이 쪽에 강점을 지닌 연출가가 아니라는 거에요. 놈놈놈과 관상의 중간 지점에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결국 시원함에선 김지운에 미치지 못하고, 생활 개그에선 한재림에 미치지 못한 애매한 무언가가 나온 것이죠. 더군다나 그 애매함은 영화의 깊이에서도 보여요. 탐관오리들에게 등골을 빨려 도적이 된 백성들의 분노 같은 것은 그 어설픈 개그에 가려 사라지고, 구조가 만들어낸 서자의 열등의식 같은 것 또한 그저 스쳐 지나갑니다. 감독의 전작들이 집요할 정도로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간 군상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얕디 얕은 연출은 당황스럽기만 한 일이죠. 뭐, 영화라는 것이 늘 진지 빨고 문제의식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재미있는 액션 활극은 그 자체로 훌륭해요. 다만 이 영화가 그 어느 쪽에도 제대로 속해있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겠죠.
확실히 감독과 배우에 대한 기대가 컸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 그다지 나쁜 영화는 아니에요. 그냥 흔한 사극 베이스의 한국 영화입니다. 그래서 맘에 들지 않습니다. 앞서 대체 가능한 하정우 문제를 언급했듯 감독에 대해서도 똑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의 감독이 왜 윤종빈이어야 하는가? 윤종빈이어야만 했는가? 전혀 아니란 거죠. 졸업 작품으로 영화제를 휩쓸고 ‘천재’ 라 칭송 받던 젊은 감독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그 천재의 테이스트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작을 내놨다면 관객은 무슨 감상을 내놔야 하는 걸까요. 그래서 이 영화는 제게 물음표 덩어립니다. 마치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봤을 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던 그 느낌처럼.
여기서부턴 스토리의 허점에 대해 얘기하려니 피치 못할 스포일러가 포함될 것 같습니다.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니 그냥 읽으셔도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일단, 인물들이 왜 이렇게 얼 빠져 있는 겁니까? 무지몽매한 백성들이니 그들의 멍청한 행동들은 뭐 그러려니 합시다. 그런데 강동원 제수 되는 여자는 왜 지 남편 죽인 놈들 밑에 붙어있는 거에요? 잔치 놀러 갔던 남편이 도적 때에 죽어서 졸지에 신세 조진 여자인데, 일언반구 없이 그 마누라 챙겨준다고 낑낑대는 도적놈들이나, 거기서 아무 번민 없이 붙어있는 여자나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어이가 없어요. 이경영 역의 땡중은 대의를 위한 희생이니 하며 ‘죄 없는 포졸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 하는데, 이건 그러려니 해도 왜 ‘죄 없는 농민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니 대의를 저버리는 건지. 게다가 그 농민들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 죽이고 애기 태어나기 전에 배 속에서 산모와 함께 죽이려던 강동원은 막상 그 애를 보더니 집에 데려와선 아버지한테 그거 걸렸다고 후달려선 난리를 칩니까. 결국 그 애 지킨다고 허세부리다 뒤지고. 최종보스 포지션을 지키려면 끝까지 악역의 간지를 뽐내던지, 변심하려면 관객이 좀 납득할 수 있는 전개를 보여줘야죠. 이럴꺼면 차라리 강동원을 포스 넘치는 절대악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왜, ‘관상’ 에서 이정재가 보여준 모습처럼 말이에요. 결국 영화를 캐리한 유일한 캐릭터마저 병신이 되고야 마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기분이 참담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 참….
방화 | 3103명이 읽었어요. 52.14.168.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