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모두 의사이고 (심지어 부인도 의사) 메디컬 스쿨을 장학생으로 입학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뉴욕대 영화과를 지망하며 틴에이저 시절동안 만든
단편영화만 40여편에 달할만큼 영화에 미쳐있던 그는 무난하게 메이저 스튜디오에
발탁되어 어린 나이에 저예산(헐리웃 기준-_-)의 독특한 센스를 가진 감독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작품은 자전적인 성장담
와이드 어웨이크(1998)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정식개봉은 된 적이 없고 DVD로
직행한 작품인데 흥행수입이 50만달러에 불과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세번째 작품인 '6감'의 초특급 흥행으로부터 타이틀롤인 브루스 윌리스를 섭외해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여 만든 네번째 영화 '언브레이커블(1999)'은 수퍼히어로의 탄생과
지적인 빌런의 만남으로 클리셰를 비튼 명작이었고 제작비 대비 다섯배에 가까운
흥행을 이루어냈지만, 최고 흥행작인 '6감'이 제작비의 17배를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중박에 그쳤다는 평가까지 받았었지요. 그래도 멜 깁슨을 동원해 더 큰 판을 벌인
다섯번째 작품 '사인(2002)' 까지는 비평과 흥행 모두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마다 관객들은 더 특별한 '반전'을 원했고
흥행도 점점 시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빌리지(2004)'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미장센과 미술이 너무 아름다웠던
'레이디 인 더 워터(2006)'도, 매번 다른 세계관을 그리며 색다른 소재를 다루면서도
'해프닝(2008)'같은 참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렌드를 벗어난, 한물 간
감독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라스트에어벤더(2009)'를 보고 저는 실날같이 남겨둔 희망을 접을 뻔 했거든요.
그러다 그의 열 두번째 장편영화 '23아이덴티티(Split,2016)'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알고계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소름돋는 연출에 지리고 말았죠.
데이빗 던이 히어로로 각성하게 된 계기를 만든 이스트레일 177 열차전복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세 편의 영화가 3부작으로 완결되는 순간입니다.
트릴로지라는 낱말은 이제 흔하디 흔해빠졌습니다. 웬만한 장편영화 프랜차이즈는
거의 모두 3부작 구성을 띄게 되었고, 히어로의 탄생 - 실패와 추락 - 거듭된 승리는
왕도적인 플롯이며 모두를 만족시켜온 머니코드입니다. 히어로가 탄생했고 이어서
수퍼빌런이 등장했으니 당연히 마무리에서는 둘의 대격돌이 예상되지요.
무려 19년만에 데이빗 던이 활약하는 것입니다. 예고편만 보더라도 비스트의 활약은
눈이 부십니다. 방방 뛰어다니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씬들이 기대를 부풀리죠.
그런데 말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글래스' 라는거죠.
물론 히어로와 빌런 사이에서 두뇌게임을 하는 미스터 글래스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기 때문에 그를 중점적으로 다루나보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 짐작은 절반쯤은 맞고, 틀리기도 했습니다.
히어로의 승리도, 빌런의 패배도 아닌 이스트레일 177 트릴로지의 마지막은
결국 미스터 글래스의 이야기였습니다. 맥빠지는 결말이다, 절정을 이뤄야할
극적인 순간에 반전 같지도 않은 시시한 반전으로 관객을 농락한다는 평가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구요. 빠르게 썩어가는 토마토 지수도 그런 점을 반영하지요.
M.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이시라면 엔딩 크레딧까지 꼭
빼먹지 말고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사족같은 쿠키영상따위는 없습니다만
20년전 '언브레이커블' 부터 담아온 감독의 메세지가 깨진 파편처럼 구석구석
빛을 내며 박혀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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