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입니다. 그 다음은요?”
“너희들의 나태. 너희들은 병적으로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훈련이나 작업은 물론이지만, 분명 너희들에게도 유리한 일도 시키기 전에는 안한다. 대신 기회만 있으면 자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멍청히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배부른 사병이 가장 열렬히 바라는 게 그 두 가집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이 와전된 쾌락주의라 생각했다. 개인주의와 현실 숭배의 기형적인 결합 같은 것-하지만 그것도 너희들의 그 철저한 방기의 설명으로는 불충분해.”
“맞습니다. 잘 보셨지만 과장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렸습니다.”
“무언가?”
“니힐이죠. 병사의 절망입니다.”
“병사의 절망?”
“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 버린 자아의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죠.”
소설가 이문열씨가 작가로 등단할 때 발표된 ‘새하곡(塞下曲)’이란 소설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풀자면 ‘변방의 노래’정도 될 듯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육사를 중퇴한 ‘강 병장’과 통신과장 ‘이 중위’입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장교인 이 중위와 사병인 강 병장이 나눈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장교인 이 중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 알기 힘든 사병들의 ‘행태’에 대해 솔직하게 강 병장에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강 병장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강 병장은 이 중위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절망’을 내놓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엄밀히 따지면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분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절망을 느끼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아래의 인터넷 댓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입니다.
“군대에 있는데 애인하고 헤어져 부모님이 아파도 못나가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 죽어도 군대에 있어야 하는 게 바로 자유를 빼앗긴 자들이다. 자유를 빼앗긴 자들은 바로 군인이고 그걸 알기나해?? 단 하루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자유를 빼앗겨서 그걸 감내하면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야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봐라 그럼 이해할 꺼다 얼마나 뭐 같은지.”
이 댓글은 상당히 투박하지만, 이문열씨가 소설 속에서 이야기했던 “니힐”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유의 박탈’인 것이죠.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신청한 ‘휴가’가 외면당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영화 ‘집으로’를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한국인들이게 외할머니는 참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그런 ‘존재의 이유’를 깡그리 무시하는 곳입니다.
조금 심각한 이야기이지만, 최근 훈련소에서 사망한 ‘훈련병’ 이야기도 본질은 ‘자유의 박탈’입니다.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신분이 ‘군인’ 더 엄밀히 따지면 군인보다 못한 ‘훈련병’이기 때문에 병원에도 마음대로 못 갔다는 게 문제의 본질입니다.
군의관의 처방 없이 의무병이 약을 줬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군대란 항시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조직입니다. 전쟁이 터졌는데, 전장에서 군인의 팔다리가 끊어지고 심장이 멎었는데, 의무병이 군의관의 ‘지시’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어떤 전쟁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선에 있는 전투병들이 의지하고 믿는 것은 ‘의무병’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멎는 날이 없고, 특히 한반도라고 하는 특수한 위험 지역에 태어난 남자이기에 이런 것들을 모두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숙명’이라면 숙명이겠지요.
문제는 이런 비애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특히 여성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들도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최근에는 ROTC도 하지 않느냐고.
풋.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정말 답이 없어집니다. 본질은 본인이 선택을 한 것이냐, 아니면 선택의 여지없이 끌려갔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성 군인 간부들이 남성 군인들보다 얼마나 쉽게 군 생활을 하느냐하는…증명하기 힘든 문제로 입씨름을 하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버거워도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 아니냐”는 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선택에 따른 많은 혜택이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남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부 선택의 길을 걸은 남성들이 있긴 있습니다. 직업 군인의 길을 걷는 남성들이 이에 해당되지요. 사관학교․ROTC 등등.
그래서 소설 ‘새하곡’에서 장교와 병장이 나누는 대화처럼 ‘장벽’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장벽은 군대를 경험하지 못한 여성들뿐만 아니라, 국방부 장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최근 트위터에서 “훈련병시절은 "군인화"가 되어가는 기간이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시기지요. 많은 보살핌도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훈련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은 ‘군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문제점이라는 뜻이지요. 보살핌“도”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이런 견해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군인이, 어떤 훈련병이 ‘아프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군대에서 군인이 아프고 힘든 것은 그냥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역사책이 나오기 이전부터 바뀔 수 없는 ‘숙명’이었고,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바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멍에’인 것이지요. 다만 국가별로 다른 점은 이 아픔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 하는 점뿐입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한 객관적 상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위층의 ‘병역면탈’행위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무인(武人)의 길이 좋아서 직업 군인을 ‘선택’한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군인이었기에, 군대에 있었기에 당해야 했던 비인간적인 처우. 글로 다 옮기면 뭐하겠습니까?
최근 군 가산점 문제로 논란이 일면서, 많은 예비역들이 일명 ‘열폭’을 하더군요. 많은 글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일부 여성들은 ‘찌질이’라는 말로 응수를 하더군요.
이런 ‘평행선’적인 사회 분위기는 아무런 사회적 합의도 도출해 낼 수 없습니다. 많은 예비역 남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희생한 삶에 대해서 ‘최소한’의 감정벅 보상을 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남성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군 가산점 문제에 대해 ‘찬성’의사를 밝히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가 군대 가서 고생했다는 것을 사회가 인정해주는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그들이 군대에 가서 소위 말하는 ‘개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사회가 알아주길 원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성 일각에서 주장하는 모든 남성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대다수의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실질적 보상이 ‘뜬구름’잡기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국방부 장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병의 ‘비애’를 어떤 국가가 ‘실질적’인 보상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http://pann.news.nate.com/info/251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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