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경기 기준으로도 규정이닝의 3년치가 넘는 이 숫자는, 믿기 힘들지만 프로야구 역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이다. 그렇다. 불꽃을 태우고 사라진 '너구리' 故 장명부(1950~2005)의 1983년 투구 이닝이다.
최동원이 1984년에 기록한 284⅔이닝 역대 2위 기록보다 143이닝이 더 많으며, 김시진이 1985년에 기록한 269⅔이닝보다 158이닝, 선동열이 1986년에 기록한 262⅔이닝보다 165이닝이 더 많았다.
투수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공을 던지게 된 1900년 이후, 메이저리그에서조차 장명부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는 1906년 에드 왈시(464) 1904년 잭 체스브로(454⅔) 1903년 조 맥기니티(434) 3명뿐이다. 모두 100년 전 선수들로, 왈시와 체스브로는 공에 침을 발라 던지던 스핏볼러였다.
이들이 활동한 시대 메이저리그 시즌은 154경기였다. 1983년 프로야구는 그 3분의2에 불과한 100경기 시즌이었다. 맥기니키가 팀 이닝의 34%, 왈시와 체스브로가 33%를 책임졌던 반면, 장명부는 절반에 가까운 47%였다.
1982년 승률 .188를 기록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올린 승수는 15승(65패)이었다. 하지만 1983년 장명부는 그 2배인 30승을 혼자 올렸다. 이는 팀 전체 승리(52승)의 58%에 해당되는 것으로, 1900년 이후 메이저리그 기록인 1972년 스티브 칼튼의 46%를 크게 넘어선다(1982년 박철순은 43%).
1982년 삼미는 OB 베어스와의 대결에서 16전 전패를 당했다. 하지만 1983년에는 20경기에서 10승10패를 기록했는데, 그 중 6승이 장명부가 완투한 경기였다(2⅔이닝 세이브도 하나 기록했다). 한편 장명부는 가장 강했던 삼성전에는 7번 선발로 나서 모두 완투승을 따냈으며 구원 3경기에서 1승1세이브를 기록했다. 장명부에게 호되게 당한 삼성은 이듬해 김일융을 영입했다.
60경기(44선발) 36완투(5완봉) 30승16패 6세이브 2.34
장명부는 그 해 삼미가 치른 100경기 중 60경기에 나섰다. 선발로 나서면 경기당 8⅔이닝을 소화했으며, 구원으로도 평균 3이닝씩 던졌다.
장명부는 선발 경기의 82%에 해당되는 36경기를 완투했다. 후기 리그에서 구원 등판을 병행하지 않았다면 완투율은 90%를 넘었을지도 모른다. 완투경기에서 얻은 성적은 26승10패. 26완투승에는 13이닝을 포함해 7개의 10이닝 이상 완투승이 들어 있다(13이닝 1회, 12이닝 2회, 11이닝 1회, 10이닝 3회). 완투패 10번 중 7번은 2번의 0-1 패배를 포함한 3실점 이하 패배였다.
장명부는 4월6일부터 6월4일까지 19경기 연속 완투(15승4패)와 함께 5월8일부터 5월29일까지 8경기 연속 완투승을 따내기도 했다. 완투승 행진에 제동이 걸린 것도 9회말 김재박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아서였다(장명부는 시즌 막판 다시 김재박에게 3타점 2루타를 맞아 평균자책점-승률 타이틀과 멀어지게 된다).
5월12일 해태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장명부는 하루를 쉰 후 14일 해태전에서 다시 완투승을 따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을 쉰 후 17일 OB전에서 또 완투승을 따냈다. 6일 동안 27이닝을 던진 것. 5월24일부터 6월4일까지는 11일간 6경기에 나서 모두 완투, 56⅓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완투 후 하루를 쉬고 다시 완투에 성공한 것이 4번에 달했으며, 구원 등판을 한 바로 다음날 선발로 나서 완투한 것도 4번이었다. 13이닝을 던지고 이틀을 쉰 후 완투를 하기도 했다. 전기 리그 마지막 3일은 구원 4⅓이닝, 구원 5이닝, 선발 9이닝 완투로 3일간 18⅓이닝을 던지기도 했다.
시즌 첫 경기를 제외한 전반기 23번의 선발 등판은 하루를 쉬고 나선 것이 6번, 이틀을 쉬고 나선 것이 10번, 3일을 쉬고 나선 것이 6번으로, 1경기(5일 휴식)를 제외한 22경기에서 3일 미만의 휴식을 취했다.
선발로 나선 44경기에서 장명부의 평균자책점은 2.41(28승15패)이었다. 그 해 선발투수 평균자책점이 장명부보다 더 좋았던 투수는 MBC 청룡의 이길환(1.93)과 류종겸(2.35)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선발로서 장명부보다 각각 230이닝과 300이닝을 덜 던졌다. 장명부는 구원으로 나선 경기에서도 1.74를 기록했는데, 그보다 더 좋았던 투수는 역시 청룡의 하기룡(1.08)이 유일했다.
전기 리그에서 장명부는 완벽한 선발 에이스였다(24선발 2구원). 선발로 24경기에 나서 20번 완투했으며, 17승 모두 선발승에 완투승 16승이었다. 후기 리그가 되자 장명부는 선발에 불펜 에이스까지 겸업했다. 이에 선발 20경기에서 16완투와 11승을 거두고, 구원 14경기에서 2승1패 5세이브를 기록했다.
당시는 모든 팀들이 투수 한 두 명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장명부는 이닝 팀 동료인 2위 임호균(234⅔), 공동 3위를 차지한 삼성 김시진과 해태 이상윤(229⅓)보다 무려 200이닝 가까이를 더 던졌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당시 기사를 잠깐 들여다 보자.
장명부의 주무기는 어떤 특별한 것 없이 스크류, 커브, 빠른공 등 무엇이든 던져대는 데 있다. 또 하나 비장의 무기라면 노련한 경험. 초반에는 대충대충 던지다가도 승부처라고 생각되는 대목에 이르면 깜짝 놀랄만한 빠른공을 던진다. 82년의 수퍼스타였던 박철순이 한 타자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전력투구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다른 스타일이다.
장명부는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상황마다 타자마다 대응법을 달리했다. 뛰어난 타자에게는 전력을 다했고, 실력이 떨어지는 타자에게는 그 타자를 잡아낼 수 있을 만큼의 힘만 사용했다. 그 해 .369로 타격왕에 오른 장효조를 상대로 19타수4안타를 기록한 장면은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렇다면 장명부는 왜 그렇게 많은 이닝을 던지려 했을까. 다음은 의 한 대목이다.
장명부는 입단 기자회견에서 "20승 정도는 기본이고 30승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호헌 KBO 사무차장과 허형 삼미 구단 사장은 박철순이 전년도에 24승을 올렸으나 30승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장명부는 "정말 30승을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따졌고 허형 사장이 농담삼아 "1억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무심코 이야기했다.
장명부는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30승을 만들어내기 위해, 1억원을 받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선발투수가 잘 던지고 있는 동점 상황에서 등판을 자청해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으며, 승리 가능성이 사라지자 제멋대로 마운드를 내려오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러 동점을 허용하고 승리를 챙겼다는 의혹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장명부가 기록한 30승 중 구원승은 2개뿐이며, 동점을 허용하고 승리를 챙긴 것은 그마저도 1승에 불과했다. 장명부는 30승을 위해 그보다는 선발로 나서 자신이 직접 경기를 끝내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면 장명부는 1억원의 받았을까. 다시 에 따르면, 30승에 성공한 장명부는 시즌 후 삼미 구단에 1억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단은 문서로 남아 있는 조항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장명부가 크게 반발하자 삼미 구단은 허형 사장은 개인돈 기천만원을 주는 것으로 겨우 달랬다.
1983년 삼미는 장명부를 데려오면서 계약금 7500만원, 연봉 4500만원에 이사 비용, 아파트 임대비 등을 포함해 무려 1억8000만원을 쏟아부었다. 그 해 장명부의 실제 수입은 1억2000만원으로,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가 3차례 타이틀 매치를 벌여 받은 대전료 6000만원의 2배, 천하장사 이만기의 우승상금 4000만원보다 3배가 많은 것이었다.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박철순의 비공식 연봉도 4000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장명부는 씀씀이가 헤펐고, 특히 일본에서 찾아오는 무수히 많은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한 푼도 모으지 못했다.
시즌 후 삼미 구단은 장명부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조건은 현금 4억. 하지만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금액이었다.
장명부의, 장명부에 의한 시즌은 1983년이 마지막이었다. 장명부는 혹사 후유증으로 1984년 13승20패 3.30(261⅔이닝) 1985년 11승25패 5.30(246이닝)에 그쳤다. 1986년 빙그레로 이적했지만 다시 1승18패 4.98을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일본에서 택시운전 등을 하며 어렵게 살았던 장명부는, 2005년 4월13일 한 마작하우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불멸의 기록을 하나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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