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배트맨의 인기가 명성에 비해서 그리 높지 않았다. 배트맨 시리즈는 그저 그 이름만이 유명했을 뿐, 대한민국 영화계에선 돈이 되는 흥행 카드라고는 보기 어려운 패였다. 하지만 2008년 '다크나이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배트맨은 한국에서도 돈이 되는 영웅이 되었고, 조커는 불멸로 남게 되었으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수많은 한국 영화인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선사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영화를 들고, 2010년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계에 다시 나타났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좌절을, 누군가에겐 새로운 희망을 선사할 영화 '인셉션'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월드가 선사하는 최고의 지적 유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인셉션'을 통해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직조공은 바로 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인셉션 시키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어디 따라올테면 따라와보시지'라는 모 광고 카피만큼이나 도발적으로 시작되어 도발적으로 끝이 난다. 꿈이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듯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애매모호하고, 관객들은 시종일관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상황과 인물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꿈에 대한 관념과 느낌을 이미지로 형상화해 관객들과의 미로 찾기 놀이로 승화시킨 그의 작업은 가히 탁월했다. 또한 여느 감독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복잡 다단한 이야기를 그는 섬세하고 촘촘하게 직조해내는데 성공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2단계?' '아니 3단계' 하는 장면에선 마치 '평범한 감독들이었다면 '2단계에서 머물렀겠지, 하지만 난 그 이상으로 간다!' 라고 외치는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자칫 스스로가 만든 미로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대부분의 관객들을 데리고 미로를 탈출한다.(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보니, 그 미로 속에서 낙오된 관객들도 적지 않아 보였다.)
다크나이트 + 매트릭스 =/ 인셉션, 메멘토 + 프레스티지 = 인셉션!
'인셉션'은 영화의 홍보 문구처럼 '다크나이트'와 '매트릭스'에 빚지고 있다기 보다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인 '메멘토'와 '프레스티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영화의 느낌이나 분위기는 '다크나이트'와 흡사하고, 꿈에 대한 인용이나 몇몇 장면은 '매트릭스'의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어느 평론가의 조금 과격한 표현을 인용하자면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와 '인셉션'의 꿈 속 세계가 다른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잘게 나뉜 꿈의 파편들을 모아모아 이야기를 재조립 하는 것은 흡사 잘게 나뉜 기억의 조각들로 이야기가 거꾸로 흐르는 '메멘토'의 그것이고,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항상 의심해야 되는 점은 이것이 마술인지 현실인지 항상 의심해야만 했던 '프레스티지'의 그것이었다. 여기에 두 편의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익스트렉션'하여 첨가하게 되니, 혹자의 표현대로 그의 맛깔스러운 미로 게임은 이젠 더 이상 관객에 대한 도발이니 도전이니 할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의 전작에 사로잡혔던 이들에게 영화 '인셉션'의 예고편은 이렇게 유혹한다. "준비 되었는가? 그렇다면 (돈 내고)영화관으로 달려오라, 그리고 같이 한번 머리 싸매고 끙끙거려보자."
친절한 오락 영화? 필요없어! 난 크리스토퍼 놀란이야!
'다크나이트'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최고의 흥행 감독중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친절한 오락 영화 감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그의 미로 게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오락거리라 할 수 있지만, 가끔 그의 영화는 지나치게 미로 게임에만 빠지게 되어 그 외의 것에서 선사할 수 있는 즐거움은 소홀한,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는 '인셉션'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는데, 물론 이 영화는 이야기와 그 구성만으로도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영화만이 선사 가능한 즐거움을 많이 포기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신경쓰면 훨씬 긴박감 넘치는 총격씬과 추격씬이 가능했을 것이고, 불릿 타임 씬과 무중력 액션씬, 꿈 속 세상의 변화등도 잘 이용했다면 관객들에게 큰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꿈 속의 모습이나 무중력 액션씬등은 그저 잠시 '신기'했을뿐 그것을 통해 무언가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이는 '다크나이트'나 '프레스티지'에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다크나이트'에서나 '인셉션'에서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스펙터클과 액션이란 그저 이야기 진행상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곳에 위치한 것일뿐, 그것을 통해 어떠한 장르적 즐거움을 선사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크나이트'에서는 히스 레저의 조커라는 당대 최고의 흡입력을 가진 케릭터가 있었기에 그런 영화속 오락적 '쾌감'의 빈자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조커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한 쾌감이었기에) '인셉션'에서는 그런 조커가 없기에 영화의 런닝타임 2시간 30여분중 후반으로 갈 수록 이야기의 힘만으로는 지쳐 가는 느낌이 역력했다.
이렇듯 영화 '인셉션'은 누군가에겐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좌절을, 누군가에겐 여름철 부실했던 관객몰이에 단비가 되어줄 수 있는 희망을, 누군가에겐 오래간만에 2시간 30분 동안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머리 싸매고 끙끙 될 수 있는 이야기거리를 선사해주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대단했지만 앞으로도 큰 기대를 갖게 만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12년 7월에 개봉할 다크나이트의 후속편에서는 또 어떤 미로 게임으로 즐거움을 선사할지 벌써부터 몹시 기대된다. 그나저나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 혹은 영화를 보지 않은 당신, 당신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읽기 시작한 그 시작을 기억하는가? 난 왜 기억이 안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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