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성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당대 헐리웃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하나인 데이빗 핀처가 돌아왔다. 에일리언 3에서부터 조디악까지, 많은 영화 매니아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든 그의 신작 소식에 아카데미가 술렁 거리더니 그 파도가 대한민국에까지 밀려온 모양이다. 지난 조디악 개봉 시절 널널하다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던 텅빈 객석들이 이제는 코 흘리게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가득 들어찬 객석들로 변한 것은 아주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미국에선 아카데미 시상식의 흥행과 영향력이 갈수록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이렇게 우리나라에선 되려 아카데미의 후광이 커진걸 보니, 확실히 1년 사이에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갔다는 얼토당토한 생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다시금 음미해보고자 한다.
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가장 명확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데카르트 같은 아저씨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사실을 하나 꼽으라면 이러나 저러나, 앞으로 흐르던지 뒤로 흐르던지 시간은 항상 흐른다는 것이다.
영원하다는 뜻은 변화하지 않은채 고정된다는 뜻이다. 영원하며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은 의미를 상실한다. 시간이 항상 흐른다는 사실은 영원불멸이지만 시간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이 때 시간의 변화는 존재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더 없이 큰 의미를 부여 받는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 존재라는 것의 범위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범위를 포함하는 범위이다. 따라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범위는 시간이 변화함에 함께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때때로, 딱히 바쁜 일이 없어 심심할때, 무언가 인생의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을때, 그 변화로 인해 주어진 의미에 대해 사유해보곤 한다. 요컨데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영화 속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처럼 나이를 먹는 다는 것, 그 나이를 먹는 것으로 인해 외모가 변한 다는 것, 그리고 결국엔 그 변화에도 끝이 있다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전세계 인구의 1.2%쯤 존재한다는 남들이 'Yes'라고 할때 자기는 'No'라고 하는 청개구리띠가 아닌 이상 그 변화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고 우울하게 끝을 맺곤 하는 것이다. 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입을 빌려 데이빗 핀처는 벤자민 버튼의 아버지에게, 데이지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아니 강요한다.
'결국 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 그 끝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누구나 한번쯤 영원한 젊음을 꿈꾸곤 한다. 벤자민 버튼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는 이 흰소리 같은 꿈에 절반쯤 부응하는 사람이다. 벤자민 버튼 또한 타인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 외모가 변화하지만 그의 외모 변화는 타인과는 전혀 다른 역주행이다. 이제는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 데이지와 그녀의 앞에 불현듯 나타난 파릇파릇한 벤자민 버튼의 모습을 그림자로 담아내 대비시키는 장면은 사람들의 꿈을 더할나위 없이 환상적으로 극화 시킨 장면이었다. 너무나도 젊고 생생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벤자민 버튼의 젊은 모습은 사람들의 꿈을 이용한 일종의 덫이다.
앞서 말했듯 변화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한명 예외없이 모두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항상 똑같은 외모를 지닌다면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외모의 변화는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 나온 신들처럼 항상 똑같은 외모에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그에 따른 무의미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따라서 벤자민 버튼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모가 변한다는 것은 그의 양부모가 했던 말처럼 사람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갈 뿐이지 결국 영원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정 - 죽음이라는 도착점을 향하는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것은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결국 영화의 제목과 달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이 아닌 '똑바로' 흐르는 것이다. 이것은 벤자민 버튼의 인생을 상징하는 상징물인 영화 속 기차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기차탑의 시계는 다른 시계들과는 움직이는 방향이 반대이다. 이 시계는 우리가 흔히 정상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시계에 표면적으로 비교했을 때 '거꾸로'흐르는 시계가 된다. 하지만 그 '거꾸로' 흐르는 시계 또한 단지 다른 시계들과 움직이는 방향이 반대일뿐 시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지 방향이 반대일 뿐이니까) 그 시계는 '거꾸로' 흐르는 시계가 아닌 '똑바로' 흐르는 시계가 된다. 벤자민 버튼과 기차역의 시계는 '거꾸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움직이며' 그 끝은 여타 사람들과, 여타 시계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는 벤자민 버튼의 정신은 (흔히 우리가 곧잘 잘못 사용하는 단어인)'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은 비록 태어남과 끝마침의 외모가 타인과 조금 다를 뿐, 그 내면의 모습은 타인의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벤자민 버튼은 외모는 비록 노인이지만 아이와 다름없이 굴고, 아이의 외모를 지닌채 치매에 걸린 괴팍한 노인처럼 행동한다. 벤자민 버튼의 타인과 조금 다른 육체적 변화는 결국 눈속임과 진배없으며,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는 변화에 무가치한 집착을 하는 것이라고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해석일까?
데이빗 핀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니 똑바로 간다!
음울한 분위기와 고통의 왕이라는 데이빗 핀처의 이 이색적 로맨스 이야기를 데이빗 핀처의 추종자들과 평단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훗날 팀버튼 감독이 이 원작 소설을 다시 한번 영화화 하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이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데이빗 핀처 만의 음울한 분위기도, 데이빗 핀처만의 재기넘치는 영상미도, 관객의 뇌리에 깊히 파고드는 고점도 없는 어찌보면 극히 평범하고 무난하기에 아주 이색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일 뿐 사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것처럼 데이빗 핀처의 이 이색적 작품 또한 어디까지나 이색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일뿐 관객에게 '닥치고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그 만의 주입방식과 환상적 로맨스의 이면에 숨겨진 외로움과 시간의 변화에 따른 변화에 대한 그만의 성찰은 그의 재기발랄함이 넘치다 못해 과도했던 이전 작품들과 크게 다를바 없다. 조디악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데이빗 핀처가 자신만의 과도한 스타일과잉을 걷어내는 대신 점점 깊이를 얻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물론 나 또한 그만의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스타일과잉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로맨스 판타지를 만들던지, 음울한 자화상을 그리던지 그의 작품은 데이빗 핀처의 색깔을 입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의 '변화' 또한 변화하므로써 의미를 갖게 된다. 앞으로 그 변화의 의미를 좀 더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찾아와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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