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밤은 어린 시절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겁쟁이였던 나는 어둠이 싫었고, 밤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점점 어둠이 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낮보다 밤이 더 친근한 날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슬프고, 어린 시절 어둠보다도 두렵다.
낮보다 밤이 더 긴 세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대지를 홀로 걷는 듯한 삶을 사는 스웨덴 소년 오스칼. 영화 렛미인은 낮보다 더 매혹적인 어두운 밤의 세계를,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무엇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암흑의 대지를 홀로 걷는 한 소년의 이미지를 아주 훌륭히 표현한다.
소년에게 밤이란 두렵고 심란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소년에게 어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소녀가 찾아오면서 밤은, 그리고 어둠은 되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세계가 되었다. 결국 소년은 낮보다 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끝이 날 때, 소년에게 알량한 한줌의 동정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너는 누구니?’‘난 너야’
어린 시절 나는 TV에서 고전 드라큐라 영화라도 할라치면 어른들 뒤에 숨어 영화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겁 많은 꼬맹이였다. 그런 겁 많은 꼬맹이가 소설과 영화를 통해 느껴지던 음울한 이미지에 매혹되어 언제부턴가 그렇게 겁을 내면서도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이 멸망시키는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영화 렛미인은 공포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고, 참고하지도 않았다는 감독의 이야기처럼 기존의 호러 혹은 공포영화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렛미인은 호러 영화로 볼 수도 있고, 한 소년의 성장영화로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영화가 담고 있는 기묘한 이야기만큼이나 기묘한 영화였다.
영화 렛미인에서는 기존의 뱀파이어에 대한 이미지와 설정을 상당부분 가져와 사용한다. 뱀파이어가 된 시점에서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 흡혈 욕구에 의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 흡혈의 대상이 된 사람이 다시 뱀파이어가 되는 등의 설정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주가 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이야기의 주가 되는 뱀파이어에 대한 설정은
‘너는 누구니?’
‘난 너야’
‘날 초대해줘. 난 초대해야 들어갈 수 있어.’
‘왜? 벽이라도 막고 있어?’
보통 뱀파이어등의 존재들은 스스로의 자력이 아닌 살아있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며 그로인해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와 설정은 그리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 렛미인은 타인에 의해 어둠 속을 살아가는 소년과 타인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는 소녀의 사랑을 그려내므로써 그 사랑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보통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특별한 사랑을 그린 영화이지만 기존의 사랑 이야기와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화 렛미인에서 뱀파이어에 대한 설정을 이용한 공포 영화적 요소는 이렇게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공포스럽지 않은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 렛미인은 기본적인 공포 영화적 분위기와 느낌을 선사하되 한층 더 자극적이고 공포스러움을 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을 넘지 않는 방법으로 공포영화로서의 가냘픈 끈을 놓지 않으면서 앞서 말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을까?
‘오늘 밤엔 그 애를 안 만났으면 해’
그 어린 시절 겁쟁이였던 나도 어느덧 이제는 아이보다는 어른이라는 단어에 더 친근한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더해가는 삶의 깊이만큼 나는 점점 사람들 말하는 무한한 믿음과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과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순수한 사랑이란 과연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렛미인에 대한 많은 감상평과 리뷰등에서 내가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이 점이다.
‘렛미인은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오스칼의 이엘리에 대한 사랑이? 이엘리의 오스칼에 대한 사랑이? 나는 위의 소제목으로 쓰인 대사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저런 감상평들의 아래에 이런 리플을 달고 싶다. 순수한 사랑? 영원한 사랑? 조건없는 사랑? 그런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랍니다.
그리고 아마도 더는 환상에 빠질 수 없게 되어버린 많은 이들이 영화 렛미인을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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