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란 혈겁에 휩쓸려 다닌지도 어언 수십일, 본좌는 모처럼만에 펜이라는 칼을 버리고, 학업이라는 강호를 (잠시)은퇴하기로 결심했다. 은퇴를 기념하여 모처럼 들러본 전영객잔엔 전형적인 비수기 영화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오늘은 이거다!'로 뽑힌 주인공은 모처럼만의 무협 액션 영화인 검우강호였다.
(주의 : 아래엔 영화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본좌만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이후,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홍콩 섬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을 포함한) 중국의 무협 액션 영화들은 몇몇 소수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시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많은 홍콩의 액션 히어로들과 영화 스텝들이 헐리웃으로 떠나자 대륙의 영화 수준은 그 공백을 매꾸기 버거웠고, 그 결과 과거 홍콩 영화들의 독창적인 장점과 특유의 분위기를 상실한 대륙의 영화들이 우리 곁으로 몰려왔다. 와호장룡의 아류작들이 쏟아졌고, 일단 동원된 엑스트라가 많으면 스팩터클하다는 식의 B급 헐리웃 블록버스터화 된 액션 영화들이 판을 쳤다. 자연스럽게 한국 관객들에게 명절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르던 성룡과 이연걸은 한국 영화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무협의 시대는 그 명맥이 다한듯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과거 수많은 총잡이들을 양성해 낸 오우삼 감독과 검우강호의 스텝들은 검우강호를 통해 8~90년대 관객들을 무림 속 협객으로 만들어냈던 홍콩 무협 액션의 그 맛을 극적으로 살리는데 성공했다.
먼저 영화의 이야기가 탄탄했다. 모 잡지기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전 무협영화들의 액기스만 뽑아놓은 듯한 설정과 흐름으로 채워진 영화가 바로 검우강호였다. 절대 내공을 얻어 무림 최고수가 되려는 무림인들의 탐욕으로 인한 혈겁, 그런 지긋지긋한 혈겁에 지쳐 강호를 떠나 은둔하지만 그 빼어난 실력으로 인해 옛 동료나 적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초고수라는 설정등은 그 자체로는 고루하기 그지 없어보인다. 사실 액기스라는 것이 잘 쓰면 장점들을 모은 것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어디서 본 듯한 모양새가 되기 쉽상이고, 그런 액기스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을 저해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흔히 흡성 대법을 사용하는 고수들중 열에 여덟아홉은 흡수한 진기를 다스리지 못해 패가망신 하지 않던가...) 다행스럽게도 검우강호는 스탭들의 웅후한 내공으로 그 액기스들을 자신들만의 장점으로 다스리는데 성공했다.
이야기를 안정시킨 1등 공신은 다름 아닌 이야기의 흐름이었다. 아무리 각종 무협 영화의 액기스들만 뽑아낸 영화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느 한곳에 몰려 있거나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어느 순간엔가 지루함을 느끼거나 이야기가 억지스럽다고 느끼기 쉽다. 이것은 장르 영화들이 범하는 흔한 실수 중 하나인데, 지나치게 한가지 장점에 집중한 나머지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기본을 엉망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검우강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액기스들을 잘게 흩어놓고 그것들을 촘촘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고전 무협 영화의 팬이라면 검우강호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땔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무협의, 무협을 위한, 무협만의 분위기 연출이 매우 흡족했다. 양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던 장면 중 하나인 증정(양자경)과 흑석파 자객들과의 대치 장면을 예로 들면, 옛 동료들의 습격을 예상한 증정은 단정히 집을 치우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듯 바느질을 한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자객들은 그런 증정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증정의 은둔을 비웃는다. 이윽고 성급한 자객중 한명이 칼을 빼어들고 증정을 도발한다. 묵묵히 참던 증정은 번개처럼 발검자세를 취하고, 이에 자객들은 황급히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든다. 무기를 빼들던 자세로 멈춘 그들은 무거운 정적속에 대치하고, 관객들도 누군가 먼저 칼을 뽑아들었을 때 시작될 혈풍을 예감하며 팽팽한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화려무쌍한 칼부림을 보여주는 것만이 무협 액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홍콩의 명작 액션 영화들은 화려한 액션 못지 않게 바로 이 분위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영화들이었고, 오우삼 감독은 그 중심에 있던 실력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검우강호의 탁월한 분위기 메이킹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적벽대전에선 단점으로 작용하던 오우삼 감독의 장점이 무협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분위기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검우강호에서는 잘 조성된 분위기 덕분에 한층 더 빛날 수 있었던 신기묘묘한 칼부림 액션이 있었다.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검술 액션과 어색하거나 과도하지 않은 와이어 액션,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칼 끝을 잘 표현해낸 컴퓨터 그래픽등은 수준 높은 퀄리티의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었다.
그런 분위기와 액션을 120% 살려낸 양자경, 정우성 커플의 협연도 영화의 재미에 큰 한 몫을 담당하였다. 과거 영화 '무사' 시절 혼자 창 하나 들고 CF 찍고 다니던 대한민국 대표 간지인(?) 정우성표 간지와 액션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양자경 누님의 자태는 그 자체로도 팬들에게 큰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강호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자경 누님의 자태는 11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점을 떠올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몇년간 쏟아졌던 대륙풍 무협 액션들의 영향 탓인지 검우강호의 흥행세는 그리 좋아보이지 못한다. 괜찮은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 자리를 빌려 말하자면 검우강호는 와호장룡의 짭퉁도 아니고, 적벽대전 같은 B급 블록버스터도 아니었다. 과거 8~90년대 홍콩의 무협 액션에 열광하던 이들이 아직 남아있다면, 잘 만들어진 무협 영화를 보고 나서 피 끓는 마음으로 함께 검론(劒論)을 나눌 무림 동포들이 남아있다면, 검우강호는 한줄기 빛이 될 수 있는 영화였다. 덕분에 본좌는 모처럼 숨은 진주를 찾아낸듯한 만족스러움을 안고 전영객잔을 나설 수 있었다.
(주의 : 아래의 동영상에도 영화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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