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 이 글에는 영화 속 내용이 많이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본인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멧 데이먼 콤비의 열렬한 팬이며, 과장 좀 보태서 본 시리즈만 30번 정도 넘게 보았고, 그린 존을 누구보다도 기다려 온 사람이자,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때도 홀로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그린 존의 예찬론을 펼친 사람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린존 우왕ㅋ굳ㅋ 이 영화 좀 짱인득? 님들 빨리 그린존 보러 텨가삼!' 라는 식의 글을 썼겠지만... 영화를 본 후 잠들기 직전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그린 존의 아쉬움만을 토로하고 있기에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팬이 아니겠느냐?'는 밑도 끝도 없는 팬심에 의거하여 그린 존이 아쉬웠던 몇가지를 지적해보고자 한다.
1. 나는 밀러, 당신은 국장, 우리는 착한 놈, 그리고 우릴 제외한 미국 정부 놈들은 나쁜 놈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끝끝내 풀리지 않았던 궁금증 두가지가 있었다. 밀러 준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전쟁에 대한 의구심과 브라운 국장의 이라크인 뺨치는 이라크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파운드스톤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의거한 이라크 제건 정책은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전쟁 영화들과 현실 세계의 클리셰를 빌려 어느 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저 두 사람의 행보는 영화 속 판타지를 위한 역할들이라는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물론이고, 많은 관객들이 로이 밀러의 진실을 향한 불타는 정의심이나 전쟁을 향한 순수한 분노에 동참할 수 없었다. 우리는 로이 밀러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고, 그의 정의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관객의 눈에는 단순히 그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헤메고, 그것을 찾지 못해 허탈해하고, 허탈함에 열 받아 목숨을 걸고 진실을 찾아 헤메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관객들이 로이 밀러의 진실을 향한 욕심이나 전쟁을 향한 분노를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로 너무도 다급하게 진실을 찾아 헤메다가 총질을 해대고 마지막엔 분노와 쓴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가 본 시리즈를 보며 3부작에 걸친 제이슨 본의 분노와 복수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이슨 본이 기억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만약 제이슨 본이 밑도 끝도 없이 '나는 전직 CIA킬러, CIA가 하는 더러운 짓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진실을 밝혀야겠다.'라고 떠벌리며 활보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본 시리즈는 액션만 가득한 평범한 액션 첩보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요컨데 아무리 뛰어난 액션, 화려한 장면이 넘쳐나는 영화라도 기본적인 '드라마와 케릭터'라는 뼈대가 약하다면 관객들은 좀처럼 빠져들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본 시리즈가 타 액션첩보 영화들에 비하여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탄탄한 드라마와 케릭터들에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번 그린 존은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2. 이 영화의 제목은 The Bourne (Black)HawkDown?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린 존의 전투씬은 상당히 훌륭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특유의 관객이 그 현장 한복판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현장감은 여전히 압도적이며, 그 특유의 스타일이 전쟁 영화라는 장르와 만나 기존의 전쟁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스타일의 전투씬과 추격씬을 선보인다. 특히 그린 존의 마지막 추격씬은 본 울티메이텀에서의 탕헤르 추격씬과 워털루역 추격씬을 적절히 섞어놓은 듯 했다.
하지만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본 시리즈의 제작진은 그들이 고이고이 쌓아두었던 본 시리즈의 유산을 다른 액션 스릴러 영화들이 아주 원없이 펑펑 탕진했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이룩해두었던 새로운 액션의 표준은 첩보 액션의 대부격인 007시리즈부터 시작해서 헐리웃 영화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심지어 한국에서도) 액션 영화들의 교과서가 되어 철저히 인용되었고, 현장감을 살리는 극단적인 핸드헬드 촬영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래로 이미 전쟁 영화 촬영의 기본중의 기본이 되어왔으며, 특유의 정신없는 컷 교차 편집 기법은 첩보액션 장르에서와 달리 전쟁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라는 특성상 영화 음악에서 많은 힘을 얻지 못하는 점도 크다.(본 시리즈 추격씬이 주는 긴장감의 5할은 음악이 선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최첨단 광학 테크놀러지를 이용한 추격씬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필두로 본 울티메이텀에서 그 정점을 찍었고 또한 본 울티메이텀에서 자극을 받은 많은 액션첩보 영화들이 우리내 어머니들이 뼈다귀 한번 사면 두어달은 사골국물 우려먹듯이 아주 주구장창 우려먹었던 소재라서 이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때 '이라크전'이라는 영화 장르를 따로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조크가 생겨났을 정도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전쟁, 반전 영화들이 많았던 점도 그린 존에게 썩 좋지 않은 요소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영화가 많지 않지만 요 몇년 사이 본인이 본 이라크전 배경의 영화도 3~4개 정도가 될 정도로 이라크전은 그리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하는 소재이다. 게다가 그 영화들이 갖는 메시지들이 한결같이 '전쟁은 사람을 그지같이 만든다' 혹은 '이라크 전은 미국의 실수'이었기에 이야기와 메시지의 새로움도 느끼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일반 관객들이 보기에 그린 존은 본 시리즈 제작진이 이라크를 배경으로 찍은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식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감정 이입이 안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디서 많이 본듯한 영화의 화면들이 펼쳐지니 관객들은 즐거움을 느끼기 보다는 심드렁한 느낌을 받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3. 프레디,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속 로이 밀러가 진실을 알고 싶다며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들쑤시며 다니는 모습을 보던 중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불안함은 로이 밀러가 이라크 장군과 접선하기 위해 뛰쳐다니던중 미 정부가 이라크군의 전면적인 해체를 선언하는 부분에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 양반들... 이거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결말을 내려고...' 그 불안함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 사방에 미군이 이라크군과 싸우며 로이 밀러와 이라크 장군을 찾아 에워싸고 있는 한복판에서 밀러가 이라크 장군을 총으로 겨누는 장면에서 결국 한숨으로 변하고 말았다. 밀러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저희와 함께 가시죠' 뿐이었던 것이다.
이라크 장군이 밀러와 함께 갔던지 안 갔던지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제거되었을 것이고, 이라크는 미국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영화 안팎의 모두가 진실을 알거나(혹은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된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했을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알고 있었고, 아마 이라크 장군에게 총을 겨누며 자신과 함께 가자던 영화 속 로이 밀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린 존의 결말은 마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속시원한 답을 쓸 수 없는 주관식 문제 앞에서 에라 모르겠다며 이도저도아닌 횡설수설만을 늘어놓은채 내버린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렇기에 밀러와 관객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시원하지 못하고, 파운드스톤은 협박을 당해도 무섭지가 않으며, 프레디는... 밥은 잘 먹고 다닐런지 어쩔런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의 연속, 그리고 시원찮은 결말... 이쯤되니 그린 존의 미국에서의 대실패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결국 그린 존은 기대치에 비해 미흡한 점이 많았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특히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고, 현재로서는 그린 존의 실패로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멧 데이먼 콤비는 본 시리즈 4탄과 영영 넘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이미 하차한다고 알려졌는데, 그린 존의 상업적 실패를 보고도 무리해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을 기용할 것 같지는 않으니;) 하지만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멧 데이먼 콤비의 힘은 아직 이 정도가 끝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영화 흥행은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던가?(아님 말고;) 한번의 실패로 굴하지 말고 다음에도 멋진 영화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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