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XAR, 이 양반들은 도대체...
지난해 여름, 극장에서 쓰레기처리 로봇으로 인해 두시간여동안 넋을 잃었던 일이 있었다. 스크린 위에 토이스토리로부터 라따뚜이에 이르기까지 픽사라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든 것이 그려지자, 그것을 보고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 이야기가 나올 때면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며 WALL-E 예찬을 하던 기간이 있었다.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부분에 함께 후보로 올랐던 쿵푸팬더와 볼트 또한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WALL-E는 2008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고, 픽사의 역사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그야말로 거대한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다.
WALL-E를 보고 난 뒤, 한동안 픽사 제작진들은 부담을 좀 갖겠구나 싶었다. WALL-E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엇보다도 WALL-E의 완성도 수준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WALL-E는 캐릭터, 표현력, 재미, 유머, 감동등 작품의 거의 모든 부분이 흠잡기 어려운 영화였고, 다소 빈약한 스토리라인을 제외한다면 픽사는 쓰레기처리 로봇 하나로 어지간한 실사 영화 이상의 높은 영역에 다다른 작품을 만들어냈다.
올 여름, 이번엔 괴팍한 노인과 상급 대원을 노리는 어리버리한 꼬마아이, 그리고 풍선에 의해 떠다니는 집과 함께 두시간을 넋을 잃고 나니 새삼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이 양반들은 도대체 무얼 먹고 살기에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거지?' 지난해에 이어 올해 픽사는 WALL-E와는 또 다른 상상력으로 다시 한번 괴물 같은, 놀라운, 엄청난, 명불허전, 광세무적, 동방불패등등(...;)의 수식어가 한 트럭은 필요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 이름은 바로 'UP'이다.
(UP의 두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과 러셀, 픽사가 오랜만에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는 픽사의 자세
지금부터 UP에 대한 예찬에 들어가겠으니... 우선 기발한 상상력, 놀라운 표현력, 재미, 감동, 교훈등의 지금까지 아홉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들을 통해 픽사가 보여주었던 장점들에 대해서는 UP에서도 기본적으로 갖춰진 장점이니 이 정도로 간단히 나열만 하고 넘어가겠다.(그야말로 두말하면 타이핑 하는 손가락 아픈 이야기들 아닌가?) 픽사의 열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UP이 WALL-E 조차도 뛰어넘어 한 단계 진일보한 점은 바로 이야기의 무게감이다.
그동안 장편 9개 작품을 발표하면서 픽사의 이야기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통해 인간의 세계를 돌아보고, 인간적 교훈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인크레더블의 주인공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만화적 히어로들의 이야기이니 대충 비인간이라 생각하고 넘어가자 ^^;) 픽사는 그들만의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을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그들을 통해 인간의 세계를 돌아보고, 그들을 통해 인간적 교훈과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그려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했고, 그런 연유로 인해 픽사의 상상력과 표현력으로도 작품 속에 인간의 삶과 세상은 단편적인 모습만이 담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픽사의 기존의 작품들도 분명 대단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였다.)
픽사 최초의 인간이 주인공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UP은 노인과 아이라는 인간의 삶 속에서 양 대칭점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좀 더 본격적으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인간의 삶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 맺음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마치 하루가 다르게 변하가는 도심지에 버티고 서있는 오래된 가옥처럼 아내가 죽은 뒤 점점 세상과의 동화를 잃은채로 살아가던 노인 칼이 위기를 맞아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이나, 단지 뱃지를 늘려 상급 대원이 되기 위해 우물쭈물 어리버리 노력하는 어린아이 러셀이 진정한 모험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은 그동안의 애니메이션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무거운 주제이지만 그 어떤 실사 영화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생생함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처럼 UP은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칫 부담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절묘히 균형을 맞추므로써 아이들의 눈높이와 어른 들의 눈높이의 합의점을 찾은 작품이었다. 때로는 떠오르고 때로는 가라앉는 집의 모습처럼 UP은 때로는 아이들을 위한 단순 발랄한 코믹 액션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른들을 위해 켜켜이 쌓인 세월이 주는 무게를 느끼게 만드는 작가주의적 드라마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모습으로도 UP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위한 단순 만화로도, 어른들도 큰 재미와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도 볼 수 있는 만화경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집을 이끌며 가는 노인의 모습이 마치 인생을 묘사한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과한걸까?)
넌 말이 별로 없구나 그래서 좋아
픽사는 WALL-E를 통해 진정한 감정의 표현은 굳이 많은 대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UP에서 가장 놀라우면서도 가장 감동적이며 깊은 울림을 느끼는 순간은 다름 아닌 영화 초반 칼과 앨리의 인생을 무성 영화의 형식으로 짧막히 보여주는 부분과 영화 종반 칼이 러셀을 돕기로 마음을 먹기 전 앨리와 찍은 앨범을 보는 장면이었다. 이는 WALL-E가 보여준 행동과 접촉의 표현력보다도 뛰어난 것이어서, 애니메이션 속의 흑백 사진을 보는 장면이 그 어떤 실사 영화 못지 않은 깊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는 것이 그저 놀라움 자체였다.
WALL-E에서 진일보한 캐릭터화와 그 캐릭터의 행동과 표정을 통한 표현력도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평가할만 했다. 인간은 인간이되 인간을 캐리커처화 하여 표현한 UP의 인물들은 캐릭터의 겉모습에서부터 그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이 묻어져 나왔고, 대사와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었다. 그런 하나하나가 합쳐져 UP의 캐릭터들은 2시간여동안 관객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각 캐릭터의 성격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 컷,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덕분에 픽사의 캐릭터 구현 능력이 한층 더 빛나 보였다.)
그런 캐릭터와 이야기를 한껏 빛나게 해준 조력자로 영화 속 대사를 꼽을 수 있다. 간혹 영화속 인물들이 내뱉는 평범한 문장, 평범한 어투의 말이 그 상황과 버무려져 잊을 수 없는 명대사 명장면으로 자리잡는 일이 있다. 그리고 더더욱 드물지만 그런 평범해보이는 영화 속에 그런 명대사 명장면들이 즐비한 영화도 있다. UP은 바로 그 더더욱 드문 영화에 속하는 작품이었다. '내 어릴 적 영웅이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야생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야생적이라고나 할까?', '집은 단지 집일 뿐이야.', '이 지루한 얘기가 제가 기억하는 제일 아름다운 추억이에요'등의 대사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명대사 명장면들이었다.
(나의 파라다이스 폭포는 어디였더라? ^^;)
픽사라는 비행기의 다음 기착지는...
UP의 영화 시작시간에 늦지 않고 입장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번에는 픽사가 일찌감치 다음 작품을 공개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Toy Story 3', 기존 Toy Story의 두 주인공 우디와 버즈가 10년만에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벌써부터 내년 여름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UP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은 픽사가 1년 뒤 어떻게 돌아올지... 그나저나 이 양반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냐구요?!!
(내년엔 이 분들이 오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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