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실체를 얻습니다. 허섭한 쪽대본을 가지고도 배우가 해석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연기가 나올 수 있고 어떤 것을 선택하여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줄 것 인가를 판단하는 것, 최종적으로 도출된 결론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연출가에게 있습니다.
카지노(Big Bet)은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욕망을 쫓아 머나먼 타국에 의탁하다가 기회를 얻어 무지막대한 자산을 축적하고 그 와중에서 명멸하는 인간군상들의 이권다툼속에서 결국 목숨을 다하는 플롯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심지어 은막이 아닌 연속 드라마에 24년만에 얼굴을 비춘 최민식이라는 대배우의 아우라가 자리한다는 것 만으로도 기대 만발하는 대중들의 관심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창조주로서 강윤성 감독은 흥미로운 캐릭터들의 화학작용을 깔끔한 각본으로 다룰 줄 아는 충무로의 새로운 아이콘 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김래원 영상화보 <롱 리브 더 킹>에서 원작 웹툰의 단점 따위는 티끌로도 칠 수 없는 거나한 삽질을 보여줌으로서 호사가들의 악플을 받아야 했습니다만 범죄도시 2편의 그럭저럭한 흥행으로 인해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만큼은 외면받지 않았습니다.
<카지노>는 초반부터 약 3회에 달하는 분량을 소모하며 공들여 인간 차무식의 성장담을 보여줍니다. 고집 세지만 끈기있고, 가오에 죽고 못 사는 자만심만큼이나 내 사람들에 대한 진심은 따뜻한 남자. 군사독재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폭력 전과자인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차무식의 인생은 보다 풍요로웠을런지 모릅니다만 감독은 집착에 가까을 정도로 차무식의 인간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합니다.
민회장의 첫 의뢰로 채권추심을 하러 다닐 때에는 무자비하게 사람을 쥐어 패기도 하고 연장을 휘두르는데도 서슴이 없고, 구질구질한 영업방해 행위와 협박을 오가면서 밀린 돈을 받아내는 그 였지만 사실 그렇게 냉혹하지도 않고, 그저 맡은 바에 충실하려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옥바라지에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까지,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금새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는 아내를 만나는 부분까지 시시콜콜한 면모를 보여주느라 정작 우리가 보고싶었던 차무식의 성공과 파멸, 필리핀에서 성가신 인물들을 묻어버리는 도박왕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나 누가 보더라도 별 볼일 없는 양아치 양정팔을 휘하에 거두면서 마치 친 형제처럼 챙겨주는 이유 같은 것들. 뱀눈깔을 희번덕 거리며 야리던 상구가 수족처럼 따르게 된다거나, 암흑계의 거물인 다니엘이나 호형호제하는 존 같은 키 맨들의 관계성립에 대해서는 패를 감추듯 꼭꼭 숨겨놓고 풀지 않았습니다.
첫 에피소드에서 그를 포박하던 테렌스 같은 정의로운 경찰은 대체 왜 등장시켰던 걸까요? 오승훈 경감은 아예 빠지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지원을 기다려야 할 30분 때문에 개죽음 당한 마크 같은 현지 경찰과 차무식 패거리의 대립만으로도 관객들은 똥줄을 바짝 조이면서 다음 편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OTT플랫폼의 뒷배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제작투자의 어두운 면모인지 모르겠지만 카메오 출연처럼 능력있는 배우들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맥거핀으로 던져두는 씬 들이 전반적인 이야기의 긴장감을 모두 흐트러뜨리고 말았는데, 계속 비슷한 역할로만 소모되다 보니 극의 개연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삐걱거릴지언정 굴러는 가던 1시즌에 이어 아 씨바 할 말을 잃게 만들어 버린 2시즌에서 헛웃음이 터지던 에피소드는 허성태가 연기한 서태석의 최후입니다. 인적없는 호수까지 차를 몰고 가 트렁크에 묶어놓고 살해하려던 그가 죽기 전 삼합회 친구들의 도움으로 모양빠지게 구출된 차무식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놓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실날같은 기대라도 했었다면 되려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1시즌에서 그토록 긴 시간을 들여 철두철미한 준비성과 깔끔한 뒷처리가 가능한 남자로 포장해 둔 것을 감독이 잊어버렸는지 대체 무슨 헛바람이 들어서인지 빠루 몇 방이면 작살날 지하실 금고에 전 재산을 쟁여놓은 것도 모자라 돈 몇푼에 오락가락하는 건달 나부랭이들 외에는 뒷처리를 시킬 인적자원도 없는 반달 주제에 무슨 깡으로 정재계를 제 몸 처럼 주무르는 다니엘에게 개길 엄두를 했으며 감히 도박왕의 사촌동생이자 아길레스 현직 시장을 불쇼로 구울 수 있었는지 그 전 에피소드에 차무식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힌트라도 준 것은 아니었나 돌려볼 뻔 했습니다.
마치 이 작품은 감독이 묵혀두었던 서로 다른 줄기를 가진 서너개의 트리트먼트를 투자금 받은 김에 쟁쟁한 배우들도 싹 모아다 놓고 감독 스스로가 좋아하는 스콜세지나 타란티노 영화처럼 펑펑 지르는 맛으로 재미있게 놀다온 뒤 허겁지겁 그러모아 붙여놓은 콜라주 처럼 보입니다. 최민식의 필모그래피를 더럽힌 작품으로 마무리되어 매우 안타깝기 그지 없으며, 최근 쏟아져나오는 K-콘텐츠의 질적 저하가 이런 식으로 비어져 나온다는 점에서 서글퍼집니다. 18.225.31.15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