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애초에는 진보주의자 였냐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확실히 이념도 행동도 좌측에 있었네요. 공부는 조금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등록금이 싼 학교를 찾는 친구들이 모인 학교에 다니면서, 정문으로 다니는 것보다 후문으로 다니는 것에 익숙한 친구들하고 더 친해졌었습니다. 어줍지 않게 수업이 끝난 야밤에 철학과 건물에서 개최하던 마르크스 연구 모임, 학생회관의 노동자 권리 모임에 기웃거리고, 그러다가 추천 받은 리영희의 책을 읽게 되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존경 받았었던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의 책과 대담을 찾아다니고. 사실 그 무엇도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제대로 해본 적이 없지만, 나름 그 세계가 재밌고, 주류에 반항적으로 사는게 기분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좀 더 현실적인 예시로는, 노무현의 추모제 때, YTN 앞을 지날 때, 건물 창문에서 행진을 향해 뿌려지던 종이들, 봉하마을로 내려가는 버스 안 창가에 앉아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던 유시민의 얼굴이 생각 납니다.
아마도 노무현이 서거한 날이 유학생 장학금 시험날이었습니다. 이듬해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현실 정치에 별 도움은 안되지만, 적어도 술자리에서 흥분하던 저도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매우 안타까웠어요. 지금 저 촛불집회에 내가 가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나꼼수 3인방이 팟캐스트로 활약하는 것을 챙겨듣고,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이 당선 되었던 날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고,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바람이 조금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제가 소위 좌에 가까운 지지자로 기쁘게 생각했던 마지막 순간 같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이게 2017년 이었군요.
2017년에 저는 유학을 마치고 늦깎이 직장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조그만 회사였지만, 여전히 주류에 대한 반감에, 오히려 조그만 회사가 더 좋다고 생각했고, 문돌이 유학생에게 그런대로 괜찮은 급여를 주는 회사라서 재밌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은 동창 친구들도 서서히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아빠가 되었고, 개원을 하고, 과장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정리해고를 당하고, 연락이 끊기고, 귀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쯤부터 동창모임에 나오는 친구, 안나오는 친구 그리고 못나오는 친구가 갈리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나오는 친구" 가 되었습니다. 형편이 딱히 남들보다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 만으로도 적어도 체면치레는 하게 되는 상황 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시점에서 이미 저의 인간관계의 폭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업으로 이직을 하고, 여전히 "나오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그 친구들은 몇년전에도 지금도 그런대로 잘나갑니다. 가끔 그 멤버로 만나 강남에서 저녁에 술한잔 두잔해도 누가 계산할지 그렇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월급쟁이인 저는 빼고요. 이직한 대기업은 그야말로 크고 멋진 직장 이었습니다. 후문으로 다니는 친구들과 더 친했었던 저로써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분명히 좋은 사람들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강남에서 나고자라, 초중고대 한다리 건너 다 알고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즈음에 제가 주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경쟁을 하면 불공정할 뿐이라는 것을 이미 학생시절부터 알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이 통하는 곳에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렇게하다 이른 곳은 좀 다른 곳이 되었네요. 다음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제가 쭉 살아오며, 한가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입니다. 즉 평소에 어울리는 사람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닮아간다는 것이죠. 저는 이것을 꽤 오래전 부터 알았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내가 좀 뒤쳐지더라도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들과 같이 있고자 했고, 커리어에 있어서는 그것이 어느정도는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사장님과 원장님이 된 "나오는 친구들"과 정치에 신경쓰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저는 그 사람들로부터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있겠죠.
제가 자신에 대해서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부분과, 변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사회가 더 정의롭고, 모두에게 이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의로운 것은 다시말해 권선징악 입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사회는 기회와 혜택의 보편적인 평등입니다. 변한 것은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을 막는 사람들은, 극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극좌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과 똑같이 요즘은 이게 다 윤석열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람들이 같은 정치세력을 지지하고자 하는 나의 가치까지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싫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어쩌면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존감이나 우월감을 가지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르크스를 좋아한적도 없고, 상징적인 정치 이벤트에 참여했지만, 현실정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 적은 없고, "나오는 친구들"이 문재인을 욕할 때 그냥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찍 이찍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않는 선택을 했습니다. 리영희의 두꺼운 책을 끼고 다니면서 대안주의자 행세를 하는 것 마냥, 먼발치에서 이쪽저쪽을 다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허망하긴 합니다. 보수세력이 수구꼴통이라는 말을 들을 때, 진보세력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라벨이 붙기도 했었습니다.
밤에 운동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저를 돌아보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40살이 되어 보수가 되어가는 것은 제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변함없이 자존감 혹은 우월감을 가지고 싶었던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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